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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 대선출마 선언한 황종국 부장판사
연합뉴스 | 기사입력 2007-10-04 11:43 | 최종수정 2007-10-04 13:24
대선출마선언 황종국 부장판사
(부산=연합뉴스) 이종민 기자 = "경제와 남북 문제만 있는 대선에 '생명'의 중요성을 일깨우기 위해 출마를 결심하게 됐습니다"
23년간 입어왔던 법복을 벗어 던지고 12월 실시되는 대통령 선거에 출마를 선언한 부산지법 황종국(54.사시 24회) 부장판사는 4일 "자리에 욕심이 있어서 대선에 나선 것은 아니다"라고 말했다.
그는 "경제를 우선시하는 정책 때문에 생명이 다 죽어가고 있다"며 "경제와 남북문제만 있는 대선 정국에 '생명'을 중요한 이슈로 부각시켜 담론의 중심에 세우도록 하겠다"고 말했다.
그는 대선출마후 주변의 반응에 대해 "판사가 갑자기 왜 대선출마냐며 의아해 하는 분위기가 있지만, 왜곡되고 삐뚤어진 세상에서 고통을 받아온 사람들은 환호성을 보내고 있다"고 강조했다.
황 판사는 "선거일까지 완주할 것"이라면서 "그동안 은거하며 진리를 탐구해온 전국의 도인들이 선거운동에 도움을 주기로 했고, 선거사무실은 서울에 마련할 예정"이라고 밝혔다.
생명사상과 함께 우리의 전통의료술을 더욱 발전시킬 수 있는 의료개혁 등을 주요 공약으로 채택한다는 계획이다.
대선 출마를 위해 지난주 사표를 제출한 그는 이날 오전 퇴임행사를 갖고 23년간 일해온 법원을 떠났다. 그는 부산지법 앞에 사무실을 얻어 조만간 변호사로 개업할 것으로 알려졌다.
황 전 부장판사는 1992년 무면허 침구사에 대해 구속영장을 기각하면서 '병을 잘 고치는 사람이 진정한 의사'라고 말해 화제를 모았다.
그는 또 94년에는 현행 의료법이 환자의 치료수단 선택의 자유와 건강권, 생명권을 침해할 소지가 있다며 헌법재판소에 위헌법률심판을 제기하기도 했으며, 2005년에는 '의사가 못 고치는 환자는 어떻게 하나'라는 대체의학서 발간과 '민중의술 살리기' 단체를 창립하는 등 민간의료 합법화 운동을 벌여왔다.
최근에는 대선 출마의 변을 담은 '대한민국의 국가목표는 경제가 아니라 생명이어야 합니다'를 출간했다.
경남 고성 출신으로 부산상고와 성균관대 법대를 졸업한 그는 85년 부산지법 판사로 임용됐으며 창원과 울산지법 부장판사를 거쳐 지난 2월부터 부산지법 부장판사로 근무해 왔다.
연합뉴스 | 기사입력 2007-10-04 11:43 | 최종수정 2007-10-04 13:24
대선출마선언 황종국 부장판사
(부산=연합뉴스) 이종민 기자 = "경제와 남북 문제만 있는 대선에 '생명'의 중요성을 일깨우기 위해 출마를 결심하게 됐습니다"
23년간 입어왔던 법복을 벗어 던지고 12월 실시되는 대통령 선거에 출마를 선언한 부산지법 황종국(54.사시 24회) 부장판사는 4일 "자리에 욕심이 있어서 대선에 나선 것은 아니다"라고 말했다.
그는 "경제를 우선시하는 정책 때문에 생명이 다 죽어가고 있다"며 "경제와 남북문제만 있는 대선 정국에 '생명'을 중요한 이슈로 부각시켜 담론의 중심에 세우도록 하겠다"고 말했다.
그는 대선출마후 주변의 반응에 대해 "판사가 갑자기 왜 대선출마냐며 의아해 하는 분위기가 있지만, 왜곡되고 삐뚤어진 세상에서 고통을 받아온 사람들은 환호성을 보내고 있다"고 강조했다.
황 판사는 "선거일까지 완주할 것"이라면서 "그동안 은거하며 진리를 탐구해온 전국의 도인들이 선거운동에 도움을 주기로 했고, 선거사무실은 서울에 마련할 예정"이라고 밝혔다.
생명사상과 함께 우리의 전통의료술을 더욱 발전시킬 수 있는 의료개혁 등을 주요 공약으로 채택한다는 계획이다.
대선 출마를 위해 지난주 사표를 제출한 그는 이날 오전 퇴임행사를 갖고 23년간 일해온 법원을 떠났다. 그는 부산지법 앞에 사무실을 얻어 조만간 변호사로 개업할 것으로 알려졌다.
황 전 부장판사는 1992년 무면허 침구사에 대해 구속영장을 기각하면서 '병을 잘 고치는 사람이 진정한 의사'라고 말해 화제를 모았다.
그는 또 94년에는 현행 의료법이 환자의 치료수단 선택의 자유와 건강권, 생명권을 침해할 소지가 있다며 헌법재판소에 위헌법률심판을 제기하기도 했으며, 2005년에는 '의사가 못 고치는 환자는 어떻게 하나'라는 대체의학서 발간과 '민중의술 살리기' 단체를 창립하는 등 민간의료 합법화 운동을 벌여왔다.
최근에는 대선 출마의 변을 담은 '대한민국의 국가목표는 경제가 아니라 생명이어야 합니다'를 출간했다.
경남 고성 출신으로 부산상고와 성균관대 법대를 졸업한 그는 85년 부산지법 판사로 임용됐으며 창원과 울산지법 부장판사를 거쳐 지난 2월부터 부산지법 부장판사로 근무해 왔다.
2007.10.07 21:07:41 (*.230.152.35)
손도 못댔던 불치병 고쳐낸 '토종 권태훈'
'현직판사가 쓰는 민중의술' 시리즈
손도 못댔던 불치병 고쳐낸 '토종 권태훈'
민중의술 유형별 치료사례 <7>
2007년 07월 06일 (금) 황종국 부장판사 hjkook2000@yahoo.co.kr
황종국 부장판사(hjkook2000@yahoo.co.kr) 는 현직 판사이면서도 민중의술 살리기에 혼신의 힘을 기울여 왔다. 그는 유명한 민중의술을 시술하는 이들을 직접 만나고, 민중의술을 시술하다 혹연 문제가 되어 사법적 판단을 필요로할 때는 관대한 처벌로 민중의술을 지켜주는 역할도 담당해왔다.
▲ 황종국 판사
그는 "나는 12년간 병원을 다니며 앓던 콧병을 너무도 간단한 쑥뜸으로 고친 후 지금까지 22년 동안 민중의술의 경이로운 치료능력을 수없이 경험하고 확인하였다. 전신이 마비되어 식물인간 상태인 67세의 할머니가 30일간의 단식을 통하여 완전히 회복되는 것을 직접 지켜보았다."고 전하면서 "말기 간경화증으로 절박한 죽음의 고비를 몇 번 넘긴 어느 분에게 쑥뜸을 하게 하여 서너 달만에 병원에서 검사결과가 정상이라는 판정을 받기도 하였다.
중풍으로 한방병원에 열흘 넘게 입원하였으나 증세가 점점 악화되어가던 친형님을 퇴원시켜 30분간 침을 맞고 정상으로 돌아오게 하였다. 관절과 근육을 다쳐 화장실 출입도 업혀서 하던 사람이 침을 세 번 맞고 거의 정상적으로 걸어다니는 것을 보았다. 오른 팔이 올라가지 아니하여 수십 번 병원을 드나들었으나 효과가 없다고 하소연하는 사람을 잠깐 만져 채 1분도 안되어 팔을 빙빙 돌리도록 만드는 것도 보았다. 이런 사례는 끝이 없다."고 고백하고 있다. 이 '현직 판사가 쓰는 민중의술" 시리즈에는 황종국 부장 판사가 직접 전국을 순례하거나, 기자처럼 직접 취재-체험한 내용을 기록한 전통-민중의술의 기록이다. (편집자 주)
◆우학도인 권태훈 옹의 민의약
유명한 소설 『단(丹)』의 주인공인 우학도인 봉우 권태훈(鳳宇 權泰勳) 선생님도 한의원을 하셨는데, 값이 비싼 약재를 쓰는 처방을 멀리하고 주위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향토 약재들(鄕藥)을 위주로 치료했고, 돈이 적게 들거나 아예 들지 않는 민간치료법을 대량으로 수집하여 몸소 시험해본 뒤 사용하였다. 세종대왕은 가난하고 병약한 백성들을 위해 향약집성방(鄕藥集成方)이라는 의약대사전의 부록으로 신선방(神仙方)을 수록하게 하여 당시 전해오던 각종 민간요법들을 과감하게 일반에 공개했는데, 봉우 선생님도 국민복지정신에 투철하여 이를 자신의 의료행위 속에서 실천하려 많은 애를 쓰셨다고 한다(봉우 선생님에 대한 이야기는, 정재승 엮음, 세상 속으로 뛰어든 신선, 정신세계사, 2002년, 121면을 참조하였음).
봉우 선생님이 소년시절부터 겪은, 우리 전통의학계의 여러 명의들의 치료일화를, 우리 민족의술의 본질적 방법과 효능이 어떠한 것인지, 그 기미(機微)라도 맛보기 위하여, 다소 장황하더라도 여기에 소개한다.(이하에서 소개하는 내용은, 권태훈 구술, 정재승 엮음, 천부경의 비밀과 백두산족 문화(정신세계사, 1989), 326면 이하를 참조하였음)
① 사상의학을 창시한 이제마 선생과 동시대 동향인에 강홍로(姜洪魯)라는 명의가 있었다. 봉우 선생님이 열 다섯 살 때, 어머니께서 건강이 안 좋아 강선생의 진찰을 받았는데, 내용인즉 어머님이 비록 발병은 안되었으나 십 년 후 을묘년에 발병되면 중병으로 발전하여 회복하시기 어려울 것이며, 우연히 활성(活星)이 내조(來照)하여(명의가 온다는 뜻) 회생하실 것이지만, 그로부터 3년 후 재발되면 아마 승천하실 것이라고 하였다. 그런데 과연 그 십 년 후라는 을묘년에 중병환으로 어머니가 백약(百藥)과 백의(百醫)로도 치료를 못하고 있는 중에, 엄찬섭(嚴贊燮)이라는 과객이 마을 주막의 주모에게서 그 이야기를 듣고 고칠 수 있다고 장담한다기에 봉우 선생님이 곧장 달려가 모셔왔다.
그런데 그는 어머니를 관형찰색(觀形察色. 환자의 외면적 모습을 살핌)하고 나더니 진맥은 안하고 엉뚱하게도 수판(數板)을 가져오라 하여 무슨 수를 놓는지 반시간 이상 수판만 놓더니 처방을 내놓는데, 그 방문(方文) 내용이 또한 가관인 것이, 고열로 한 달 이상 고통받고 대소변 불통으로 배가 북처럼 불러있는 환자더러 부자(附子) 3냥, 인삼 2냥, 당목향 1냥씩을 한 첩으로 하여 5첩을 연달아 복용하라는 것이었다. 그 당시 집에는 경향 각지의 명의라는 의사들이 십여명 있었는데, 이 처방을 보더니, 지나가는 나그네가 노자돈이나 얻으러 온 것이지, 도무지 어불성설이라고 대소(大笑)하였다.
그러나, 봉우 선생님은 10년 전의 강홍로 선생 말씀이 불현듯 되새겨지고, 간밤에 꾸었던 꿈속에서 우연히 만난 사람이 바로 엄선생과 똑같은 얼굴이었던 터라, 이것저것 따지지 않고 막바로 약을 만들어 드시게 했더니, 다음날로 한 달 이상 잠을 못 주무시던 분이 수면을 취하시고, 이틀간을 계속 하여 주무시더니 그제서야 정신이 들고 말씀을 하셨다. 이것만 해도 기적과 같은 신통한 일이었는데, 엄선생은 다음 처방으로 보중익기탕(補中益氣湯) 배제(倍製. 원 방문에 적혀 있는 약제의 양보다 2배로 늘려 지음)로 2제만 사용하라 하였다.
그래서 곧 사용하였더니 병세가 완쾌되었다. 다른 의사들은 손도 못대던 병환이, 엄선생의 치료 3일만에 완전히 회복된 것이다. 어머니가 그 3년 후에 공주로 이사하고 나서 병환이 재발하여 엄선생을 모셔왔는데, 병색을 보고 나서 별로 위중하지 않으시니 내일 모레 자기 집에 다녀와서 치료해 드리겠노라는 말만 남기고 가더니 다시는 오지 않았고, 그 후 한 달만에 어머니는 백약이 효과가 없이 세상을 떠나셨다.
엄선생의 다른 치료 일화. 어느 날 봉우 선생님이 충북 영동에 있는 엄선생 댁에서 같이 이야기를 하고 있는데, 전북 무주에 사는 사람이 말 한 필을 끌고 와서 자기 모친 병환이 중하니 왕진을 좀 해달라는 것이었다. 엄선생은 그 말에 대답은 하지 않고 수판만 가지고 무수히 수(數)를 계산하더니, 그 사람에게 "급히 집에 가보게. 시간이 급하네."하면서 며칠 후에 다시 오라고 하고 쫓아내듯이 그 사람을 보냈다. 그런데 5일 후에 그 사람이 다시 왔는데 상복을 입고 있었다.
엄선생은 "자네가 올 줄 알았네."하더니, "자, 그럼 자네 부인의 병이나 치료하러 가세."하면서 그 사람과 동행하여 무주로 내려갔다. 그 후 3일만에 돌아와서 하는 말이, 그 사람이 그때 왕진을 청하러 왔을 때 그 모친은 이미 그 사이에 사망하였던 것인데, 그의 부인이 그 시신을 밤중에 혼자 보고는 경기(驚氣. 놀람)가 나서, 남자가 귀가해 보니 방안에 시체가 둘이더라는 것이었다. 남자가 급히 부인을 응급 처치하여 숨을 돌려놓았으나, 안심이 안되어 다시 엄선생을 모시러 온 것이다. 엄선생은 역시 부자사물탕(附子四物湯)을 써서 환자를 완치시키고 돌아왔다는 것이다.
이러한 종류의 기적이 봉우 선생님이 직접 옆에서 목격한 것만도 대여섯 차례는 되었는데, 그러면서도 정작 엄선생의 의학 실력은 도무지 그 깊이를 알 수 없었던 것이, 관형찰색으로 환자의 형색을 관찰하는 것 외에는, 진맥도 안 하고 침도 안 놓고 오로지 약만 쓰는데, 그것도 부자(附子) 외에는 별로 다루지 않았으니, 그야말로 기이한 명의라 아니할 수 없었다.
그 후 봉우 선생님이 나이가 좀 들어 생각해 본 결과, 엄선생은 정식으로 의학을 전공한 사람이 아니라, 정신수련을 통하여 조상 대대로 내려온 정신학(精神學)의 한 분야인 의학통령(醫學通靈)을 한 사람이라는 판정을 내리고 그 행적을 보니, 과연 신출귀몰한 수법이 많았다. ② 봉우 선생님의 부친이 중병으로 자리에 누우셨는데, 얼굴 전체가 부어 올라 대롱을 통해 간신히 미음 정도만 드실 수 있었다. 이규신(李圭信) 선생께서 진맥을 하시더니 발병 원인을 말씀하시는데, 가족들도 모르는 사이에 반년 전에 벌써 몸의 어느 경락에 고장이 생겨서 머리 어느 부분으로 진행되었고, 며칠간 소양증(搔痒症. 가려움증)이 일어나 그 진물이 나와서 또 후뇌부(뒷골)로 흘러가 귀 뒷부분에서 부증(浮症)이 시작된 것이니 여기에 대증처방만 하면 된다고 하였다.
그가 처방해준 약 5첩을 2일간 복용하고 아버지는 완치되었다. 이규신 선생은 구한말 유림의 선비로서, 유교의 심종(心宗)에 해당하는 많은 정신수련을 하여 깊은 정신적 경지에 도달한 분이었다. ③ 전라도 장성(長城) 사람 김세원(金世元)은 윗 조상이 조선시대 태의원(太醫院)의 종의(腫醫. 종기 전문 의사)였던 고로, 전통의학의 외과 부문만 가전지학(家傳之學)으로 이어 받은 사람인데, 외과 중에서도 종양 수술 전문이었다.
봉우 선생님이 20대에 호남 지방을 두루 다니던 중, 붕루증(崩漏症)이라고 하여 자궁 속에서 종양이 생겨 자꾸 고름이 나오는 병에 걸린 김세원의 며느리를 우연한 기회에 치료해주면서 그 집에 머물 때 본 일화. 하루는 종기로 인하여 왼쪽 무릎 관절 전체가 퉁퉁 부은 중년 부인이 찾아왔다. 무릎의 물렁뼈 바로 옆에 종기가 났는데, 너무 곪아서 그 고름을 뺀다고 잘못 손댔다가는 뼈가 상해서 다리를 아주 못 쓸 지경이었다. 무릎에서 시작한 종기가 발까지 온통 부은 상태로 발전되어서, 병원에서는 무릎 이하를 절단해야 한다는 진단을 받았다는 것이었다. 이것을 어찌 처리하나 싶어서 봉우 선생님이 옆에서 가만히 지켜보았다.
김세원은 우선 무릎의 종기를 관찰하고 나더니, 발등의 복사뼈 옆을 침으로 사혈(瀉血. 피를 빼는 것)하였다. 다시 침으로 무릎의 종기난 곳을 사혈하면서 조그만 구멍을 냈다. 그리고 직경이 1∼2㎜나 될까말까한 아주 가느다란 대나무살로 된 긴 침 같은 것을 무릎의 구멍낸 자리에 꽂더니 밑으로 밀어 넣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것을 발등의 침으로 피 뺀 자리까지 밀어 넣어서 그 밖으로 빼내더니 밖으로 나온 대나무살 끝을 손끝으로 만지작거렸다. 그런데, 그 대나무살 안쪽에는 아주 가느다란 실이 들어 있었다. 그 살을 붙잡고 무릎에서 대나무만 뽑아내니 무릎 종기 자리부터 발등까지 관통하는 실만 남게 되었는데, 그 실이 바로 종기 제거의 특수처방약이 묻혀진 약실 이었다. 그런데 이렇게 약실을 넣어두니 조금 지난 후부터 고름 같은 진물이 계속 발등의 구멍난 곳으로 흘러나오기 시작하였다. 약 3일 간을 약실을 바꿔가며 치료한 결과, 곪았던 고름이 다 빠져 나오고 부기가 완전히 가시면서 완치되었다.
전신마취를 통한 대수술의 과정 없이, 큰 고통도 없이, 이렇듯 간단히 외과적 치료를 해내는 우리 전통 외과의학의 놀라운 수준에 봉우 선생님은 큰 감명을 받았다고 한다. 김의원은 또한 대수술에 필요한 마취제인 몽혼약방문(夢魂藥方文)도 가지고 있었는데, 이름을 마불산(麻弗散)이라고 하는 가루약으로서, 한 숟갈만 먹어도 보통 3∼4일은 깨어나지 못하는 급성 마취제였다고 한다.
④ 충남 의생(醫生. 지금의 한의사)협회 회장이던 서계원(徐啓源) 씨와 충북 옥천 지방을 지나던 중 날이 저물어 수십 칸 짜리 기와집에 과객으로서 하룻밤 묵을 것을 청하여 들어갔다가 겪은 일화. 집안 분위기가 뒤숭숭하며 섬돌에는 신발이 수십 켤레 있었는데, 알고 보니 주인이 죽을병으로 몇 달째 고생을 하다가 이제 막바지에 왔는지라 부근의 의사들이 열댓 명씩 몰려와 저마다 진찰을 하고 최후로 약을 써본다고 하는데 도무지 차도가 없어 내일 모레 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마침 주인이 서계원 씨와 같은 이천(利川) 서씨(徐氏)라 하여, 서계원 씨도 적극적으로 나서서 진찰을 하더니 주인에게 말하기를, 내가 좀 몰상식한 처방을 하여도 믿고 따르시겠냐고 하였다.
당시 환자는 지속적인 고열과 복통에 시달리고 있었으며 배가 임산부처럼 불러와서 숨도 제대로 못 쉬는 상태였는데, 연신 숨을 몰아 쉬어가며 간신히 대답하기를, 이제 내 목숨이 경각에 달렸는데 한번 믿고 써봐야 하지 않겠느냐는 것이었다. 그러자 서씨는 곧 비상(砒霜) 1냥(약37.5g)을 물에 타서 그냥 환자에게 먹였다. 비상을 한 사발 들이키자마자 환자는 마구 토하기 시작하였는데, 온 방안에 하나 가득히 충(蟲)을 토하는 것이었다. 수백 마리는 되는 각종 충들이 기다랗고 머리에 털이 나고 귀까지 달린 놈, 작은 회충, 요충, 촌충 등등 해서 꿈틀거리는 것이 그야말로 흉칙하였다.
이른바 충적(蟲積. 충들이 몸 속에 쌓여 있는 병적인 현상)으로 인한 충고(蟲蠱. 충들이 뱃속에서 움직임) 증세였던 것이다. 다른 약들에는 꿈쩍도 안 하던 놈들이 비상이란 독약이 대량 투입되자 그만 못 견디고 모두 밖으로 탈출하여 나온 것이다. 그런데 평상시 비상을 그만큼 먹었다면 살아 남지 못했을 환자는 그 많은 충들을 다 쏟아내고 곧바로 흰죽을 먹고 나더니, 허탈해 할뿐 멀쩡하였다. 그 뒤로 잠을 푹 자고 난 뒤 보중익기탕(補中益氣湯) 등의 보약재를 써서 완전히 회복되었다.
⑤ 봉우 선생님이 계룡산 밑에 있는 상신 마을에 살 때의 일화. 같은 마을에 살고 있는 설초(雪樵) 김용기라는 사람의 장모가 급환으로 생명이 경각에 달렸다 하여 그 집에 가보니, 장모는 이미 눈이 감겨 있고 숨이 붙어있는지 조차 분간하기가 어려울 정도였다. 며칠 전에 미미한 증세로 앓기 시작했는데, 이렇듯 갑자기 위급하게 변화할 줄은 미처 몰랐다는 것이었다. 마침 봉우 선생님 집에 묵고 있던 나그네 한 사람이 있었는데, 이야기를 해보니 의술에 밝고 정신계의 여러 술수에도 조예가 깊은 듯하여 동행했던 차라, 그에게 좀 봐주기를 청하였다.
그는 환자를 물끄러미 쳐다보더니 진맥도 하지 않고 곧바로 말하기를, 누구든 빨리 동쪽으로 120보를 걸어가서 거기 있는 솔가지를 꺾어 오라는 것이었다. 돌연한 이 말에 설초의 처남되는 사람이 집의 동쪽으로는 소나무라고는 전혀 없다면서 이의를 달았다. 그러자 설초가 지금같이 위급한 상황에는 지푸라기라도 붙잡을 심경인데 무슨 한가한 논의냐고 하면서 빨리 갔다오라고 벽력같이 소리를 지르자 그 처남은 할 수 없이 나갔는데, 잠시 후 손에 솔가지들을 들고 나타나 하는 말이, 동쪽으로 정확히 120보를 걸어갔더니 전에는 소나무 한 그루 없던 벌판이었는데 누가 며칠 전 그 쪽 땅에 울타리를 만들면서 말뚝 사이사이에 소나무 가지를 쳐 놓았길래 그것을 뽑아왔다는 것이었다.
아무튼 그 무명의 술객은 그 소나무 가지를 물에 넣고 끓여 그 물을 환자에게 마시게 하였는데, 믿어지지 않게도 생명이 이미 90%는 끊어져 있던 설초의 장모는 이 솔가지 끓인 물을 한 대접 마시고 나더니 기적같이 소생하였다. 봉우 선생님의 생각으로는 이것이 기문(奇門) 팔문법(八門法)에 있는 생문방(生門方)에서 생기약(生氣藥)을 구해 써 준 것이 아닌가 생각한다고 하셨다.
이 술객에 얽힌 또 하나의 일화. 이웃 마을에 살던 오송사(吳松士)라는 사람의 모친이 갑자기 원인도 알 수 없고 손을 쓸 수도 없을 정도로 위독하게 되어 오늘내일 한다고 하여 이번에도 이 술객을 데리고 급히 오씨 집으로 떠났다. 중간에 고개 하나가 있었는데, 마을이 내려다보이는 고개마루터기에서 이 술객은 갑자기 멈춰 서더니 황토가 좀 필요하다고 하면서 서너 줌 파서 소매에 넣었다. 곧장 집에 당도하니 이미 곡성이 흘러나오고 마을 사람들이 흰죽을 쑤어 나르고 하는 것이 눈에 띄었다.
방안으로 들어가보니 오씨의 모친은 이미 돌아가신 듯 하였다. 술객이 다가가서 살펴보더니 아직 혼이 완전히 뜨지는 않았으니 이 황토를 물에 개어오라고 하였다. 급히 황톳물을 만들어 억지로 입을 벌려 부었는데, 환자가 정말로 아직 숨이 넘어가지는 않은 듯 꿀꺽 황톳물을 넘기더니 '푸우'하는 소리와 함께 숨을 토하면서 정신이 돌아오는 것이었다. 그 후에는 그 아들에게 산에 가서 송충이 애벌레 집을 따 오라 하여서 그것들을 푹 달여서 마시도록 하였는데, 그것을 마신 후에 모친은 완쾌되었다.
그런데 오씨의 모친이 황톳물을 마시고 깨어나자마자 하는 말이 기이하였다. 며칠 앓느라고 병석에 누워 있었는데, 갑자기 커다란 장정 네댓 명이 방안으로 쑥 들어오며, 갈 데가 있으니 같이 가자고 하면서 잡아 일으켜 세워 밖으로 끄집어내더라는 것이다. 오씨의 모친은 결사적으로 반항하며 싫다고 하였으나 막무가내로 끌려나와 떠밀려가듯 길을 가던 중인데, 갑자기 고갯마루에서부터 강렬한 광선 여러 개가 쫙 비쳐오자 끌고 가던 놈들이 그만 쏜살같이 내빼더라는 것이었다. 그래서 다시 혼자 집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는 이야기였다.
그런데 이야기 중의 그 광선이 비쳐오던 방향이 바로 봉우 선생님이 술객과 함께 넘어오다가 황토를 판 그 고개였다. 그 술객에게 이런 이상스러운 점들을 물어보았더니, 오씨의 모친은 소위 객귀(客鬼. 오갈 데 없이 떠도는 귀신)들에게 납치되어 세상을 뜨는 경우인데, 드문 일이지만 간혹 있을 수 있는 일로서, 이런 것은 일반적 의술의 범주에는 속하지 않지만 마구 쓰지만 않는다면 사용할 수 있는 방법이 있다고 하였다.
봉우 선생님은, 이와 같이 자신이 직접 목격한 경험을 통해 우리 조상들의 유구한 전통의학이 이렇듯 깊은 치료능력을 지니고 있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었으며, 이러한 놀라운 의술의 전통을 창조적으로 계승, 발전시키지 못하고 있는 후학들의 나태함과 우둔함에 머리를 들 수 없었다고 술회하셨다.
[부산지방법원 부장판사]
-- 출처 : 헬스코리아 뉴스 --
'현직판사가 쓰는 민중의술' 시리즈
손도 못댔던 불치병 고쳐낸 '토종 권태훈'
민중의술 유형별 치료사례 <7>
2007년 07월 06일 (금) 황종국 부장판사 hjkook2000@yahoo.co.kr
황종국 부장판사(hjkook2000@yahoo.co.kr) 는 현직 판사이면서도 민중의술 살리기에 혼신의 힘을 기울여 왔다. 그는 유명한 민중의술을 시술하는 이들을 직접 만나고, 민중의술을 시술하다 혹연 문제가 되어 사법적 판단을 필요로할 때는 관대한 처벌로 민중의술을 지켜주는 역할도 담당해왔다.
▲ 황종국 판사
그는 "나는 12년간 병원을 다니며 앓던 콧병을 너무도 간단한 쑥뜸으로 고친 후 지금까지 22년 동안 민중의술의 경이로운 치료능력을 수없이 경험하고 확인하였다. 전신이 마비되어 식물인간 상태인 67세의 할머니가 30일간의 단식을 통하여 완전히 회복되는 것을 직접 지켜보았다."고 전하면서 "말기 간경화증으로 절박한 죽음의 고비를 몇 번 넘긴 어느 분에게 쑥뜸을 하게 하여 서너 달만에 병원에서 검사결과가 정상이라는 판정을 받기도 하였다.
중풍으로 한방병원에 열흘 넘게 입원하였으나 증세가 점점 악화되어가던 친형님을 퇴원시켜 30분간 침을 맞고 정상으로 돌아오게 하였다. 관절과 근육을 다쳐 화장실 출입도 업혀서 하던 사람이 침을 세 번 맞고 거의 정상적으로 걸어다니는 것을 보았다. 오른 팔이 올라가지 아니하여 수십 번 병원을 드나들었으나 효과가 없다고 하소연하는 사람을 잠깐 만져 채 1분도 안되어 팔을 빙빙 돌리도록 만드는 것도 보았다. 이런 사례는 끝이 없다."고 고백하고 있다. 이 '현직 판사가 쓰는 민중의술" 시리즈에는 황종국 부장 판사가 직접 전국을 순례하거나, 기자처럼 직접 취재-체험한 내용을 기록한 전통-민중의술의 기록이다. (편집자 주)
◆우학도인 권태훈 옹의 민의약
유명한 소설 『단(丹)』의 주인공인 우학도인 봉우 권태훈(鳳宇 權泰勳) 선생님도 한의원을 하셨는데, 값이 비싼 약재를 쓰는 처방을 멀리하고 주위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향토 약재들(鄕藥)을 위주로 치료했고, 돈이 적게 들거나 아예 들지 않는 민간치료법을 대량으로 수집하여 몸소 시험해본 뒤 사용하였다. 세종대왕은 가난하고 병약한 백성들을 위해 향약집성방(鄕藥集成方)이라는 의약대사전의 부록으로 신선방(神仙方)을 수록하게 하여 당시 전해오던 각종 민간요법들을 과감하게 일반에 공개했는데, 봉우 선생님도 국민복지정신에 투철하여 이를 자신의 의료행위 속에서 실천하려 많은 애를 쓰셨다고 한다(봉우 선생님에 대한 이야기는, 정재승 엮음, 세상 속으로 뛰어든 신선, 정신세계사, 2002년, 121면을 참조하였음).
봉우 선생님이 소년시절부터 겪은, 우리 전통의학계의 여러 명의들의 치료일화를, 우리 민족의술의 본질적 방법과 효능이 어떠한 것인지, 그 기미(機微)라도 맛보기 위하여, 다소 장황하더라도 여기에 소개한다.(이하에서 소개하는 내용은, 권태훈 구술, 정재승 엮음, 천부경의 비밀과 백두산족 문화(정신세계사, 1989), 326면 이하를 참조하였음)
① 사상의학을 창시한 이제마 선생과 동시대 동향인에 강홍로(姜洪魯)라는 명의가 있었다. 봉우 선생님이 열 다섯 살 때, 어머니께서 건강이 안 좋아 강선생의 진찰을 받았는데, 내용인즉 어머님이 비록 발병은 안되었으나 십 년 후 을묘년에 발병되면 중병으로 발전하여 회복하시기 어려울 것이며, 우연히 활성(活星)이 내조(來照)하여(명의가 온다는 뜻) 회생하실 것이지만, 그로부터 3년 후 재발되면 아마 승천하실 것이라고 하였다. 그런데 과연 그 십 년 후라는 을묘년에 중병환으로 어머니가 백약(百藥)과 백의(百醫)로도 치료를 못하고 있는 중에, 엄찬섭(嚴贊燮)이라는 과객이 마을 주막의 주모에게서 그 이야기를 듣고 고칠 수 있다고 장담한다기에 봉우 선생님이 곧장 달려가 모셔왔다.
그런데 그는 어머니를 관형찰색(觀形察色. 환자의 외면적 모습을 살핌)하고 나더니 진맥은 안하고 엉뚱하게도 수판(數板)을 가져오라 하여 무슨 수를 놓는지 반시간 이상 수판만 놓더니 처방을 내놓는데, 그 방문(方文) 내용이 또한 가관인 것이, 고열로 한 달 이상 고통받고 대소변 불통으로 배가 북처럼 불러있는 환자더러 부자(附子) 3냥, 인삼 2냥, 당목향 1냥씩을 한 첩으로 하여 5첩을 연달아 복용하라는 것이었다. 그 당시 집에는 경향 각지의 명의라는 의사들이 십여명 있었는데, 이 처방을 보더니, 지나가는 나그네가 노자돈이나 얻으러 온 것이지, 도무지 어불성설이라고 대소(大笑)하였다.
그러나, 봉우 선생님은 10년 전의 강홍로 선생 말씀이 불현듯 되새겨지고, 간밤에 꾸었던 꿈속에서 우연히 만난 사람이 바로 엄선생과 똑같은 얼굴이었던 터라, 이것저것 따지지 않고 막바로 약을 만들어 드시게 했더니, 다음날로 한 달 이상 잠을 못 주무시던 분이 수면을 취하시고, 이틀간을 계속 하여 주무시더니 그제서야 정신이 들고 말씀을 하셨다. 이것만 해도 기적과 같은 신통한 일이었는데, 엄선생은 다음 처방으로 보중익기탕(補中益氣湯) 배제(倍製. 원 방문에 적혀 있는 약제의 양보다 2배로 늘려 지음)로 2제만 사용하라 하였다.
그래서 곧 사용하였더니 병세가 완쾌되었다. 다른 의사들은 손도 못대던 병환이, 엄선생의 치료 3일만에 완전히 회복된 것이다. 어머니가 그 3년 후에 공주로 이사하고 나서 병환이 재발하여 엄선생을 모셔왔는데, 병색을 보고 나서 별로 위중하지 않으시니 내일 모레 자기 집에 다녀와서 치료해 드리겠노라는 말만 남기고 가더니 다시는 오지 않았고, 그 후 한 달만에 어머니는 백약이 효과가 없이 세상을 떠나셨다.
엄선생의 다른 치료 일화. 어느 날 봉우 선생님이 충북 영동에 있는 엄선생 댁에서 같이 이야기를 하고 있는데, 전북 무주에 사는 사람이 말 한 필을 끌고 와서 자기 모친 병환이 중하니 왕진을 좀 해달라는 것이었다. 엄선생은 그 말에 대답은 하지 않고 수판만 가지고 무수히 수(數)를 계산하더니, 그 사람에게 "급히 집에 가보게. 시간이 급하네."하면서 며칠 후에 다시 오라고 하고 쫓아내듯이 그 사람을 보냈다. 그런데 5일 후에 그 사람이 다시 왔는데 상복을 입고 있었다.
엄선생은 "자네가 올 줄 알았네."하더니, "자, 그럼 자네 부인의 병이나 치료하러 가세."하면서 그 사람과 동행하여 무주로 내려갔다. 그 후 3일만에 돌아와서 하는 말이, 그 사람이 그때 왕진을 청하러 왔을 때 그 모친은 이미 그 사이에 사망하였던 것인데, 그의 부인이 그 시신을 밤중에 혼자 보고는 경기(驚氣. 놀람)가 나서, 남자가 귀가해 보니 방안에 시체가 둘이더라는 것이었다. 남자가 급히 부인을 응급 처치하여 숨을 돌려놓았으나, 안심이 안되어 다시 엄선생을 모시러 온 것이다. 엄선생은 역시 부자사물탕(附子四物湯)을 써서 환자를 완치시키고 돌아왔다는 것이다.
이러한 종류의 기적이 봉우 선생님이 직접 옆에서 목격한 것만도 대여섯 차례는 되었는데, 그러면서도 정작 엄선생의 의학 실력은 도무지 그 깊이를 알 수 없었던 것이, 관형찰색으로 환자의 형색을 관찰하는 것 외에는, 진맥도 안 하고 침도 안 놓고 오로지 약만 쓰는데, 그것도 부자(附子) 외에는 별로 다루지 않았으니, 그야말로 기이한 명의라 아니할 수 없었다.
그 후 봉우 선생님이 나이가 좀 들어 생각해 본 결과, 엄선생은 정식으로 의학을 전공한 사람이 아니라, 정신수련을 통하여 조상 대대로 내려온 정신학(精神學)의 한 분야인 의학통령(醫學通靈)을 한 사람이라는 판정을 내리고 그 행적을 보니, 과연 신출귀몰한 수법이 많았다. ② 봉우 선생님의 부친이 중병으로 자리에 누우셨는데, 얼굴 전체가 부어 올라 대롱을 통해 간신히 미음 정도만 드실 수 있었다. 이규신(李圭信) 선생께서 진맥을 하시더니 발병 원인을 말씀하시는데, 가족들도 모르는 사이에 반년 전에 벌써 몸의 어느 경락에 고장이 생겨서 머리 어느 부분으로 진행되었고, 며칠간 소양증(搔痒症. 가려움증)이 일어나 그 진물이 나와서 또 후뇌부(뒷골)로 흘러가 귀 뒷부분에서 부증(浮症)이 시작된 것이니 여기에 대증처방만 하면 된다고 하였다.
그가 처방해준 약 5첩을 2일간 복용하고 아버지는 완치되었다. 이규신 선생은 구한말 유림의 선비로서, 유교의 심종(心宗)에 해당하는 많은 정신수련을 하여 깊은 정신적 경지에 도달한 분이었다. ③ 전라도 장성(長城) 사람 김세원(金世元)은 윗 조상이 조선시대 태의원(太醫院)의 종의(腫醫. 종기 전문 의사)였던 고로, 전통의학의 외과 부문만 가전지학(家傳之學)으로 이어 받은 사람인데, 외과 중에서도 종양 수술 전문이었다.
봉우 선생님이 20대에 호남 지방을 두루 다니던 중, 붕루증(崩漏症)이라고 하여 자궁 속에서 종양이 생겨 자꾸 고름이 나오는 병에 걸린 김세원의 며느리를 우연한 기회에 치료해주면서 그 집에 머물 때 본 일화. 하루는 종기로 인하여 왼쪽 무릎 관절 전체가 퉁퉁 부은 중년 부인이 찾아왔다. 무릎의 물렁뼈 바로 옆에 종기가 났는데, 너무 곪아서 그 고름을 뺀다고 잘못 손댔다가는 뼈가 상해서 다리를 아주 못 쓸 지경이었다. 무릎에서 시작한 종기가 발까지 온통 부은 상태로 발전되어서, 병원에서는 무릎 이하를 절단해야 한다는 진단을 받았다는 것이었다. 이것을 어찌 처리하나 싶어서 봉우 선생님이 옆에서 가만히 지켜보았다.
김세원은 우선 무릎의 종기를 관찰하고 나더니, 발등의 복사뼈 옆을 침으로 사혈(瀉血. 피를 빼는 것)하였다. 다시 침으로 무릎의 종기난 곳을 사혈하면서 조그만 구멍을 냈다. 그리고 직경이 1∼2㎜나 될까말까한 아주 가느다란 대나무살로 된 긴 침 같은 것을 무릎의 구멍낸 자리에 꽂더니 밑으로 밀어 넣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것을 발등의 침으로 피 뺀 자리까지 밀어 넣어서 그 밖으로 빼내더니 밖으로 나온 대나무살 끝을 손끝으로 만지작거렸다. 그런데, 그 대나무살 안쪽에는 아주 가느다란 실이 들어 있었다. 그 살을 붙잡고 무릎에서 대나무만 뽑아내니 무릎 종기 자리부터 발등까지 관통하는 실만 남게 되었는데, 그 실이 바로 종기 제거의 특수처방약이 묻혀진 약실 이었다. 그런데 이렇게 약실을 넣어두니 조금 지난 후부터 고름 같은 진물이 계속 발등의 구멍난 곳으로 흘러나오기 시작하였다. 약 3일 간을 약실을 바꿔가며 치료한 결과, 곪았던 고름이 다 빠져 나오고 부기가 완전히 가시면서 완치되었다.
전신마취를 통한 대수술의 과정 없이, 큰 고통도 없이, 이렇듯 간단히 외과적 치료를 해내는 우리 전통 외과의학의 놀라운 수준에 봉우 선생님은 큰 감명을 받았다고 한다. 김의원은 또한 대수술에 필요한 마취제인 몽혼약방문(夢魂藥方文)도 가지고 있었는데, 이름을 마불산(麻弗散)이라고 하는 가루약으로서, 한 숟갈만 먹어도 보통 3∼4일은 깨어나지 못하는 급성 마취제였다고 한다.
④ 충남 의생(醫生. 지금의 한의사)협회 회장이던 서계원(徐啓源) 씨와 충북 옥천 지방을 지나던 중 날이 저물어 수십 칸 짜리 기와집에 과객으로서 하룻밤 묵을 것을 청하여 들어갔다가 겪은 일화. 집안 분위기가 뒤숭숭하며 섬돌에는 신발이 수십 켤레 있었는데, 알고 보니 주인이 죽을병으로 몇 달째 고생을 하다가 이제 막바지에 왔는지라 부근의 의사들이 열댓 명씩 몰려와 저마다 진찰을 하고 최후로 약을 써본다고 하는데 도무지 차도가 없어 내일 모레 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마침 주인이 서계원 씨와 같은 이천(利川) 서씨(徐氏)라 하여, 서계원 씨도 적극적으로 나서서 진찰을 하더니 주인에게 말하기를, 내가 좀 몰상식한 처방을 하여도 믿고 따르시겠냐고 하였다.
당시 환자는 지속적인 고열과 복통에 시달리고 있었으며 배가 임산부처럼 불러와서 숨도 제대로 못 쉬는 상태였는데, 연신 숨을 몰아 쉬어가며 간신히 대답하기를, 이제 내 목숨이 경각에 달렸는데 한번 믿고 써봐야 하지 않겠느냐는 것이었다. 그러자 서씨는 곧 비상(砒霜) 1냥(약37.5g)을 물에 타서 그냥 환자에게 먹였다. 비상을 한 사발 들이키자마자 환자는 마구 토하기 시작하였는데, 온 방안에 하나 가득히 충(蟲)을 토하는 것이었다. 수백 마리는 되는 각종 충들이 기다랗고 머리에 털이 나고 귀까지 달린 놈, 작은 회충, 요충, 촌충 등등 해서 꿈틀거리는 것이 그야말로 흉칙하였다.
이른바 충적(蟲積. 충들이 몸 속에 쌓여 있는 병적인 현상)으로 인한 충고(蟲蠱. 충들이 뱃속에서 움직임) 증세였던 것이다. 다른 약들에는 꿈쩍도 안 하던 놈들이 비상이란 독약이 대량 투입되자 그만 못 견디고 모두 밖으로 탈출하여 나온 것이다. 그런데 평상시 비상을 그만큼 먹었다면 살아 남지 못했을 환자는 그 많은 충들을 다 쏟아내고 곧바로 흰죽을 먹고 나더니, 허탈해 할뿐 멀쩡하였다. 그 뒤로 잠을 푹 자고 난 뒤 보중익기탕(補中益氣湯) 등의 보약재를 써서 완전히 회복되었다.
⑤ 봉우 선생님이 계룡산 밑에 있는 상신 마을에 살 때의 일화. 같은 마을에 살고 있는 설초(雪樵) 김용기라는 사람의 장모가 급환으로 생명이 경각에 달렸다 하여 그 집에 가보니, 장모는 이미 눈이 감겨 있고 숨이 붙어있는지 조차 분간하기가 어려울 정도였다. 며칠 전에 미미한 증세로 앓기 시작했는데, 이렇듯 갑자기 위급하게 변화할 줄은 미처 몰랐다는 것이었다. 마침 봉우 선생님 집에 묵고 있던 나그네 한 사람이 있었는데, 이야기를 해보니 의술에 밝고 정신계의 여러 술수에도 조예가 깊은 듯하여 동행했던 차라, 그에게 좀 봐주기를 청하였다.
그는 환자를 물끄러미 쳐다보더니 진맥도 하지 않고 곧바로 말하기를, 누구든 빨리 동쪽으로 120보를 걸어가서 거기 있는 솔가지를 꺾어 오라는 것이었다. 돌연한 이 말에 설초의 처남되는 사람이 집의 동쪽으로는 소나무라고는 전혀 없다면서 이의를 달았다. 그러자 설초가 지금같이 위급한 상황에는 지푸라기라도 붙잡을 심경인데 무슨 한가한 논의냐고 하면서 빨리 갔다오라고 벽력같이 소리를 지르자 그 처남은 할 수 없이 나갔는데, 잠시 후 손에 솔가지들을 들고 나타나 하는 말이, 동쪽으로 정확히 120보를 걸어갔더니 전에는 소나무 한 그루 없던 벌판이었는데 누가 며칠 전 그 쪽 땅에 울타리를 만들면서 말뚝 사이사이에 소나무 가지를 쳐 놓았길래 그것을 뽑아왔다는 것이었다.
아무튼 그 무명의 술객은 그 소나무 가지를 물에 넣고 끓여 그 물을 환자에게 마시게 하였는데, 믿어지지 않게도 생명이 이미 90%는 끊어져 있던 설초의 장모는 이 솔가지 끓인 물을 한 대접 마시고 나더니 기적같이 소생하였다. 봉우 선생님의 생각으로는 이것이 기문(奇門) 팔문법(八門法)에 있는 생문방(生門方)에서 생기약(生氣藥)을 구해 써 준 것이 아닌가 생각한다고 하셨다.
이 술객에 얽힌 또 하나의 일화. 이웃 마을에 살던 오송사(吳松士)라는 사람의 모친이 갑자기 원인도 알 수 없고 손을 쓸 수도 없을 정도로 위독하게 되어 오늘내일 한다고 하여 이번에도 이 술객을 데리고 급히 오씨 집으로 떠났다. 중간에 고개 하나가 있었는데, 마을이 내려다보이는 고개마루터기에서 이 술객은 갑자기 멈춰 서더니 황토가 좀 필요하다고 하면서 서너 줌 파서 소매에 넣었다. 곧장 집에 당도하니 이미 곡성이 흘러나오고 마을 사람들이 흰죽을 쑤어 나르고 하는 것이 눈에 띄었다.
방안으로 들어가보니 오씨의 모친은 이미 돌아가신 듯 하였다. 술객이 다가가서 살펴보더니 아직 혼이 완전히 뜨지는 않았으니 이 황토를 물에 개어오라고 하였다. 급히 황톳물을 만들어 억지로 입을 벌려 부었는데, 환자가 정말로 아직 숨이 넘어가지는 않은 듯 꿀꺽 황톳물을 넘기더니 '푸우'하는 소리와 함께 숨을 토하면서 정신이 돌아오는 것이었다. 그 후에는 그 아들에게 산에 가서 송충이 애벌레 집을 따 오라 하여서 그것들을 푹 달여서 마시도록 하였는데, 그것을 마신 후에 모친은 완쾌되었다.
그런데 오씨의 모친이 황톳물을 마시고 깨어나자마자 하는 말이 기이하였다. 며칠 앓느라고 병석에 누워 있었는데, 갑자기 커다란 장정 네댓 명이 방안으로 쑥 들어오며, 갈 데가 있으니 같이 가자고 하면서 잡아 일으켜 세워 밖으로 끄집어내더라는 것이다. 오씨의 모친은 결사적으로 반항하며 싫다고 하였으나 막무가내로 끌려나와 떠밀려가듯 길을 가던 중인데, 갑자기 고갯마루에서부터 강렬한 광선 여러 개가 쫙 비쳐오자 끌고 가던 놈들이 그만 쏜살같이 내빼더라는 것이었다. 그래서 다시 혼자 집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는 이야기였다.
그런데 이야기 중의 그 광선이 비쳐오던 방향이 바로 봉우 선생님이 술객과 함께 넘어오다가 황토를 판 그 고개였다. 그 술객에게 이런 이상스러운 점들을 물어보았더니, 오씨의 모친은 소위 객귀(客鬼. 오갈 데 없이 떠도는 귀신)들에게 납치되어 세상을 뜨는 경우인데, 드문 일이지만 간혹 있을 수 있는 일로서, 이런 것은 일반적 의술의 범주에는 속하지 않지만 마구 쓰지만 않는다면 사용할 수 있는 방법이 있다고 하였다.
봉우 선생님은, 이와 같이 자신이 직접 목격한 경험을 통해 우리 조상들의 유구한 전통의학이 이렇듯 깊은 치료능력을 지니고 있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었으며, 이러한 놀라운 의술의 전통을 창조적으로 계승, 발전시키지 못하고 있는 후학들의 나태함과 우둔함에 머리를 들 수 없었다고 술회하셨다.
[부산지방법원 부장판사]
-- 출처 : 헬스코리아 뉴스 --
2007.10.08 07:51:03 (*.230.152.35)
40년동안을 자연과학을 진지하게 습득해온 사람입니다.
결론으론 현대의학은 종교처럼 너무나도 많은 개혁이 필요합니다.
이건 완전한 과학이 아님니다. 너무도 잘 아시겠지만요.
생명 살리기 ... 흔한 말이 되어 버릴 수가 있습니다.
정말 바꿀것 많다고 생각합니다... 누가 언제 하려나 궁금합니다...
귀한걸 귀하게 생각할 줄 아는 마음이 지구를 살릴 것입니다.
결론으론 현대의학은 종교처럼 너무나도 많은 개혁이 필요합니다.
이건 완전한 과학이 아님니다. 너무도 잘 아시겠지만요.
생명 살리기 ... 흔한 말이 되어 버릴 수가 있습니다.
정말 바꿀것 많다고 생각합니다... 누가 언제 하려나 궁금합니다...
귀한걸 귀하게 생각할 줄 아는 마음이 지구를 살릴 것입니다.
한국사회의 총잉여가치중 의료와 사법,교육부분이 상당부분 잡아먹습니다.
이러니 경제가 성장하더라도 각가계의 소득은 엉뚱한 곳으로 흘려들어가 살림살이가
더욱 어려지는 것이 현실입니다.
이렇게된 연유는 공급을 통제한 것에 원인이 있습니다.
그리고 가까운 일본만 보더라도 기존의 메디칼을 제외한 다양한 치료법이
유사의료법이라는 법으로 보호되고 치유활동을 하는데 제한을 가하지 않습니다.
우리나라는 한의사들은 마음대로 자기전공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카이로프락틱을 추나로 위장등록하여 치료행위를 자유롭게하나 정작 정규 카이로프락틱대학을
어렵게 나온 이들은 불법의료인으로 내몰리는 것이 현실입니다.
이처럼 야만적 의료독점을 보장해주는 나라는 전세계적으로 한국 밖에 없을 것입니다.
이러한 때 민간의료합법화운동을 해오신 황종국 판사님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대선에 출마한다니 반가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한국에서 소외되고 설움받는 모든 민간의료인들
침구사.카이로프락틱,수기요법가,이소가이요법가.수지침,피부관리,물리치료사,간호사
모든 사람들에게 자유로운 삶을 만들어가는 투쟁에 모두가 떨쳐 일어나는 기회가 되면
좋을 것같습니다.
글을 잘쓰는 사람은 글로
정책에 자신있는 사람은 정책으로
자기가 가진 모든 실력을 살려 환자에게는 치료받을 자유를 민간치료사및 소외된
의료영역의 사람들은 직업선택의 자유를 만들어가는 대행진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그리고 한국에서는 의사가 10 여만명이 되는 것으로 알고있습니다.
정치는 쪽수 입니다.
그들의 수 몇배를 투표로 받고 사회적 정치적 압력을 가하면 그들의 독점권도 무너질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