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글에 올려진 네라님의 답글을 보면서
또 최근 액션불보살님과 네라님의 대립을 보며 많은 생각을 하게 됩니다..
목소리는 불가의 궁극의 정신과
그리스도사상의 궁극의 정신이 서로 조화를 이루는 것이 가장 이상적이라고 보고 있습니다...
[그리스도가 우주의 근원의 최고 에너지이며, 우리 우주의 근원적 창조력이다]
이것은 분명 사실입니다.
하지만 이 부분은 정말로 그리스도정신과 에너지를 체감한 사람에게는 공감될 수 있겠지만
그렇지 않은 사람에게는 하나의 인격적이고 초월적인 그 무엇을 연상하게 할 것입니다.
우리가 알고 있는 지금의 기독교가 탄생된 것도 그런 연유에서이죠.
그리스도 정신은 탐구나 앎이 아닌 전적인 체험으로 깨달아지는 것입니다.
탐구나 앎을 통해 깨달아지는 것은 실은 붓다의식이라 할 수 있겠습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의식란 자신의 육체를 타인을 위해 기꺼이 바치는 사람,
자신의 육체를 신을 위해 기꺼이 제공할 수 있는 사람에게 머물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타인의 존재에 대한 본질적인 사랑, 생명을 관통하는 사랑,
자신의 육체를 통해 신의 계획을 완료시키려는 자발성에 근거합니다.
이 우주가 그리스도의 에너지로 창조되었다는 것은
창조주가 바로 모든 생명과 의식들 가운데 두루 스며들게 된 것은
바로 창조주의 의식이 자신을 모든것을 바쳐 그들을 성장시키고자 하는
[그리스도의식]을 바탕으로 하고 있었음을 의미합니다.
그런 의미이지 창조주나 그리스도가
하나의 개체의식으로 다른 차원에 존재하고 있다는 뜻은 아닙니다.
창조주나 그리스도가 하나의 개인으로 존재한다는 것은
언제나 살아있는 인간의 내면을 통해서, 그 자신이 드러날 때입니다.
그렇지 않고 독립적이고 개체적인 창조주가 존재한다고 말한다면 그것은 우상을 만드는것이 될 수 있습니다.
물론 창조주(대근원)의 의식은 당연히 있겠지요.
하지만 창조주의 의식은 모든 것을 두루 감싸고, 그 안에 편재해 있기에 어디에서나 드러날 수 있습니다.
개개인의 진실한 마음을 통해서, 날아가는 새들이나 떠오르는 태양, 흘러가는 바람, 그 무엇 가운데에도 창조주의 의식은
이미 존재합니다. 하지만 인격적인 것은 아닙니다. 다만 개개의 의식을 통해 표현될 뿐입니다.
붓다의 깨달음의 가치가 많이 경시되고 오해된 부분이 있습니다.
붓다는 이우주의 창조계의 법칙과 질서에 대한 깨달음도 있었습니다.
만약 그 부분만이었다면 분명 근원(창조주)를 강조했을 겁니다.
하지만 붓다는 이우주의 창조계 이전의 본연의 자리, 즉 의식이라는 측면을 깨달았습니다.
의식이 성장을 위해 다양한 우주와 다양한 생명형태를 경험하여 진화하고,
지금의 인간이라는 진화형태를 띠게 되었음을 깨달았습니다.
실은 창조주라는 근원의식도 이 의식이라는 측면에서는 우리와 같습니다. 하지만 우리보다 더 많은 경험과 지혜를 쌓고
성장해왔다는 것, 우리보다 좀더 일찍 깨어났으며 이 우주라는 성장의 시스템을 만들어 제공할수 있다는 것이 다를 뿐이지요!
하지만 붓다가 깨달은 이 의식의 자리, 의식의 진화라는 것을 후대의 사람들은 의식이 아닌 마인드의 레벨로 격하시키게 되었습니다. 또 의식의 본래의 자리로 돌아가는 것만을 목표로 하게 되었고, 이 인간의 삶과 더나아가 이 우주에서의 체험 자체를 허망하게 보는 쪽으로 흘러갔습니다.
하지만 즉 이우주의 근원의식(창조주)에 부탁하여 이 우주에 자신의 의식을 내린이상
또 이 지구의 근원의식(지구의신)에 부탁하여, 지구에 인간으로서의 의식을 내린 이상
본인은 자신이 약속한 것처럼 성실하게 진화하고 성장하여 그 싸이클을 졸업하지 않으면 안됩니다.
중도에 돌아갈 수는 없습니다. 그것이 창조의 질서이고 서로간의 약속입니다.
붓다도 그것을 이해했고., 그래서 궁극의 깨달음을 얻었음에도 40년간 끊임없는 설법과 행으로
타인의 깨우침을 위해 자신의 몸을 바친 것이죠. 그것이 자신이 스스로 약속하고 내려온 것이었으니까요.
그리스도의식이 고귀하고 위대한 것은 분명하지만
붓다의 근본의식의 자리에 대한 깨달음도 위대한 것입니다.
다만 후대의 사람들이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본인의 안락함을 위해 왜곡한데 있을 뿐이죠.
이점은 예수님의 그리스도가르침을 이해못한 후세사람들과 마찬가지이구요.
차라리 저는 네라님에게서 그리스도의식보다는 붓다의식을 더 많이 느낍니다.
즉 이런 저런 사유의 본질을 꿰뚫고, 그 핵심을 파악하는 것은 붓다의식 쪽입니다.
그리스도의식은 실은 이론을 통한 논의보다는 상대를 위해, 상대의 성장을 위해
자신의 모든 것을 다하는 그런 쪽입니다. 즉 앎보다는 실천쪽입니다.
지금 액션보살님이 여러가지 본인의 정제되지 못한 사상을 설파하고, 또 우주의 진실한 질서를
무시한다고 해서 그분이 그렇게 비판받고 조롱당해야 할까요?
그리스도의 위대함과 최고성을 말씀하시는 분들이, 왜 그리스도의식의 에너지는 상대에게 사용하지 않으신가요?
액션불보살님은 다만 모르시기 때문입니다. 그 지점에 대해 아직 의식이 열리시지 않았기 때문이죠.
그리스도의식의 정수를 이해하는 사람은 아직 한줌의 사람뿐입니다.
그리고 그리스도의식을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최초에는 붓다의식이 필요합니다.
마치 본인이 스스로 자전하고 나서, 공전을 이해하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마지막으로 서구의 채널링정보를 전하는 분들은
정말로 붓다의식의 깨어남이 필요하다고 봅니다. 아무리 위에서 고귀한 정보를 준다 하더라도
본인들이 창조주를 저멀리 있는 초월적 존재로 보고 있다면
그 가르침에는 빛이 담기기 어렵습니다. 그래서 저는 서구의 채널링 정보를 그다지 신뢰하지 않습니다.
차라리 삶에 대한 진솔한 이야기들은 하는 스님들이 훨씬 파동이 높습니다.
그러나 스님들도 한계가 있지요. 그것은 네라님이 지적하는 그런 부분이고 저도 잘 압니다.
하지만 자신을 스스로 세우고, 자기를 다스리고 비우는 쪽은 훨씬 낫습니다.
그러한 자신의 수양이 바탕이 되어야 정말로 높은 의지가 왔을 때,
그리고 그것에 자신을 바칠 때, 정말로 큰 에너지가 될 수 있겠지요.
궁극의 관점에서 신과 인간은 상호협력적인 관계입니다.
신을 강조하는 그리스도사상과 인간을 강조하는 불가의 사상은 그래서 상호협력적입니다.
맞습니다 상호협력해야죠 불교 좋은 종교입니다.
그런데 너무아집을바탕으로 알량한 속셈을 드러낸 액션님이
결국 공격을 당할수박에없엇죠
불교자체가 잘못된건아니라고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