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많은 수련자들이 강조해 온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자신이 원래부터 부처라는 것입니다.
본인이 부처라는 것을 자각하게 되는 것을 깨달음이라고 일컬어 왔습니다.
그리고 그 사실만 깨닫는다면, 모든 것을 다 이루었다는 식으로 얘기하곤 합니다.
그런데 그것만 가지고는 부족하다는 것을 오늘에서야 깨달았습니다.
왜냐하면 자신이 부처라는 것을 알아버리면, 그때까지 마음속에 품어왔던 부처상 -일종의 이미지-
이 허물어버려지기 때문입니다.
저는 여기서 크나큰 문제점을 발견했습니다
소위 깨달았다는 사람들의 말을 들어보면, 자신이 누군지만 안다면 머리와 마음속에 일어나는 모든 것은 다 쓸모없는 허상이라는 식으로 이야기해왔습니다.
이런 논리를 공이나 무로 곧바로 연결시키는 소위 '붓다'들이 굉장히 많은데요....
부처를 부처가 하지 않는다면 누가 부처를 하겠습니까?
이것은 믿음 문제였습니다.
믿음이 약했기 때문에 두려운 것들을 회피한 것에 지나지 않았던 것입니다.
본인은 자신이 부처라는 것을 자각하고는 굉장히 뿌듯해 있는데, 마음속에서는 자꾸 예전의 불유쾌한 기억들이 자꾸 떠오르니... "에라이 이런건 다 내가 만든 것이니 무시해버리고 신나게 지금 이상황이나 즐기자! 온세상을 덮어주는 부처의 자비심? 그거 다 내가 만든 쓸모없는 허상이야!" 이런 마인드를 가지게 되고 그자리에서 안주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한마디로 말하자면 정성껏 밥상을 차려놓고선 정작 숟가락은 들지도 않고 밥상만 쳐다보며 흐믓해 하거나, 힘들게 집을 구입해놓고선 얼른 집안으로 들어가 안락한 생활은 누릴 생각을 하지도 않은채 집주위만 하릴없이 맴돌며 자신이 집을 구입했다는 그사실에만 행복해 하는 것과 다름없습니다.
믿음이 부족한 것입니다.
특정 단체와 종교에만 소속되는 폐쇠적인, 이타적인, 공격적인 믿음이 아닌 그야말로 온 세상에 대한 따듯한 사랑과 위대한 자비.... 즉 신의 권능을 지상에서 행할 수 있다는 믿음이 약했기 때문에 철저히 회피하고 외면해왔던 것이 오늘날 자칭 부처들의 현실입니다.
자신을 부처라고 생각하는 부처님들! 한가지만 여쭙겠습니다.
당신은 당신이 마음속에 그려오던 부처요 예수가 될 수 있다는 믿음이 있습니까? 이것이 정녕 당신이 만들어낸 쓸데없는 허상일 뿐입니까? 방금 자신을 때리고 돈을 훔쳐 달아난 강도를 용서해 줄 수 있습니까? 아니면 자신이 만들어낸 분노일 뿐이라며 잊어버리겠습니까?
참된 無 라는 것이 과연 무엇입니까?
신의 권능을 지상에서 행할 수 있습니까?
그것은 자신이 원래부터 부처라는 것입니다.
본인이 부처라는 것을 자각하게 되는 것을 깨달음이라고 일컬어 왔습니다.
그리고 그 사실만 깨닫는다면, 모든 것을 다 이루었다는 식으로 얘기하곤 합니다.
그런데 그것만 가지고는 부족하다는 것을 오늘에서야 깨달았습니다.
왜냐하면 자신이 부처라는 것을 알아버리면, 그때까지 마음속에 품어왔던 부처상 -일종의 이미지-
이 허물어버려지기 때문입니다.
저는 여기서 크나큰 문제점을 발견했습니다
소위 깨달았다는 사람들의 말을 들어보면, 자신이 누군지만 안다면 머리와 마음속에 일어나는 모든 것은 다 쓸모없는 허상이라는 식으로 이야기해왔습니다.
이런 논리를 공이나 무로 곧바로 연결시키는 소위 '붓다'들이 굉장히 많은데요....
부처를 부처가 하지 않는다면 누가 부처를 하겠습니까?
이것은 믿음 문제였습니다.
믿음이 약했기 때문에 두려운 것들을 회피한 것에 지나지 않았던 것입니다.
본인은 자신이 부처라는 것을 자각하고는 굉장히 뿌듯해 있는데, 마음속에서는 자꾸 예전의 불유쾌한 기억들이 자꾸 떠오르니... "에라이 이런건 다 내가 만든 것이니 무시해버리고 신나게 지금 이상황이나 즐기자! 온세상을 덮어주는 부처의 자비심? 그거 다 내가 만든 쓸모없는 허상이야!" 이런 마인드를 가지게 되고 그자리에서 안주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한마디로 말하자면 정성껏 밥상을 차려놓고선 정작 숟가락은 들지도 않고 밥상만 쳐다보며 흐믓해 하거나, 힘들게 집을 구입해놓고선 얼른 집안으로 들어가 안락한 생활은 누릴 생각을 하지도 않은채 집주위만 하릴없이 맴돌며 자신이 집을 구입했다는 그사실에만 행복해 하는 것과 다름없습니다.
믿음이 부족한 것입니다.
특정 단체와 종교에만 소속되는 폐쇠적인, 이타적인, 공격적인 믿음이 아닌 그야말로 온 세상에 대한 따듯한 사랑과 위대한 자비.... 즉 신의 권능을 지상에서 행할 수 있다는 믿음이 약했기 때문에 철저히 회피하고 외면해왔던 것이 오늘날 자칭 부처들의 현실입니다.
자신을 부처라고 생각하는 부처님들! 한가지만 여쭙겠습니다.
당신은 당신이 마음속에 그려오던 부처요 예수가 될 수 있다는 믿음이 있습니까? 이것이 정녕 당신이 만들어낸 쓸데없는 허상일 뿐입니까? 방금 자신을 때리고 돈을 훔쳐 달아난 강도를 용서해 줄 수 있습니까? 아니면 자신이 만들어낸 분노일 뿐이라며 잊어버리겠습니까?
참된 無 라는 것이 과연 무엇입니까?
신의 권능을 지상에서 행할 수 있습니까?
2005.04.29 08:21:00 (*.237.174.205)
공감합니다...먼저 우리 지구인은 스스로를 돕는 강력한 전사들이 되어야 해요...타인으로부터 더 이상의 물질적인 지원은 없습니다. 부처나 예수가 그럴 만한 재물을 가졌다고 봅니까...먼저 현실의 삶에 있어서도 우리는 만능이랄까 전천후랄까, 하여튼 자기가 삶은 스스로 자주적으로 해결한다는 프라이드를 가져야 겠쬬.그런다음 협동도 있고 외부의 원조도 있는 것입니다. 나에게 있어 가장 어려하는 핸디캡이랄지, 문제에 대하여 회피하지 않고 도전하고 직면하는 용기가 있어야 한다고 봅니다. 개인에 있어서 이런 작은 것을 못 하는자는 정작 다른 어떤 분야(낙원을 건설하고 거기에서 사는 일?)조차도 할수 없다고 봅니다.
우리는 바로 그것을, 그 겸험을, 그 모험을 하기 위해 지구라는 체제를 선택해 온것입니다.
우리에게 놓여진 이 임무는 해놓고 보면 그 승패와 상관없이 해볼만한 것입니다. 어둠이 싫지만 자기가 가장 꺼리고 두려워하는 것을 극복하는 겸험자체는 긍정적입니다.
이 알몸으로 보낸 터미네이터같은 존재들에게 부처가 우리에게 준 단하나의 무기는 우리들 마음이 현실을 창조하는 힘 하나일뿐입니다.
다만 사람들의 기호나 취향은 무수히 다양하고 거기에 도덕적 기준이나 그런 것은 정말은 없다는 것입니다.
딱히 무엇을 누가 강제적으로 해야 하기 때문에 해야한다는 법은 없습니다. 그럼으로 그가 스스로 부터 그가 선택한것에 자부심을 가지고 있다면 스스에게 투정을 하는 것은 모순입니다. 아무도 강제하지 않앗죠..다 자기 기호대로 자신이 선택해서 길을 가고 그 결과에 스스로 승복할 각오가 있으면 무엇을 추구해도 되는 거이죠...
남의 이목이나 가치판단에 기댈 것은 없습니다.
지구 어둠의 체제가 나쁘다고 누가 그러던가요...더 이상 회피하지 않고 적극적으로 부딪혀 그 어둠을 극복한 다음의 기쁨과 지혜는 말 할수 없이 큰 것입니다.그 겸험의 위대한 필요성이 있기에 어둠 또한 우주에 존재하는 것입니다. 빛과 어둠은 이미 우리들에게 있어 옳고 그르고의 도덕적 문제가 아닙니다.
그런데 여기서 우리가 알아야 할것이, 이 지구에 태어나고 어려운 상황를 맞는 모든 것이 자의로든 타의로든 이미 우리들 스스로가 바로 그 자유의지로 선택한 결과라는 것입니다.카르마란 어찌되었든 자유의지입니다. 적어도 그는 이 지구에 태어날때 그것을 거부하기 위한 어떤 일도 적극적으로 하지 않았습니다. 인간에겐 상위자아와 현재자아가 통일 되지 않고 모순이있습니다. 상위차원에서 어떤 역학대로 필요해서 바라는 것을 현재자아는 불만을 토로하고 투정하기 일수입니다. 자기가 바라는 것을 진저으로 성취 해야 한다면 지금 이 시점부터 지금까지 하던 방식을 모두 멈추고, 앞으로 지구에서 어울려 살아가는 법칙이나 자세를 스스로 개발하지 않으 면 안될 것입니다. 왜냐하면 지금까지 해온 그런 습관의 방식들이 모여져서 현재의 모든 것을 창조하기 때문입니다.
두려워하거나 싫다는 것은 현재 자아의 모순일뿐입니다. 그가 정말로 상위차원에서 어떤 임무를 스스로 부여 받지 않고 단지 싫어하기만 했다면 그는 이미 벌써 이 지구에태어나지 않았을 것입니다. 이미 그의 지구에서 존재가 이 모든 것을 스스로 선택했다는 증거가 되지요.
이 사회에 어울려 산다는 것이 서로 자극을 주어 갈등 극복을 통해 새로운 것은 창조하는 바로 그런한 역활을 하는 것이지만...좋은 모양을 하고 있뜬 아니든 이것도 스스로가 외부의 자극을 통해서 무엇인가를 깨닫는 과정이죠.
그런 의미에서 나를 나무라고 비판하는 혹은, 내가 그를 향해 비판하는 그 상대방은 바로 나 자신의 거울이요..나자신의 환영에 지나지 않습니다.
자기 선택한 것의 결과인 거울을 바라보는, 카르마에 대한 불평은 쓸데 없습니다.
무엇보다도 우리가 처한 위치가 무엇인가요...우리는 최후의 승리를 위해 일단 무엇을 목적으로 삼아야 합니까....
이 모든 게 싫다면 이제 부터라도 지구를 떠나, 혼자서 살아가는 방법을 진정으로 추구해야 겠죠.
무엇을 선택하든 어찌되었던 스스로 선택한 것에 진정한 주인의식을 가지고 있다면, 그 원인과 결과까지도 알고서 행한다면 어둠이나 선이나 빛이나 무엇을 선택하든 후회나 자기 연민이나 불평은 없을 것입니다.
우리는 바로 그것을, 그 겸험을, 그 모험을 하기 위해 지구라는 체제를 선택해 온것입니다.
우리에게 놓여진 이 임무는 해놓고 보면 그 승패와 상관없이 해볼만한 것입니다. 어둠이 싫지만 자기가 가장 꺼리고 두려워하는 것을 극복하는 겸험자체는 긍정적입니다.
이 알몸으로 보낸 터미네이터같은 존재들에게 부처가 우리에게 준 단하나의 무기는 우리들 마음이 현실을 창조하는 힘 하나일뿐입니다.
다만 사람들의 기호나 취향은 무수히 다양하고 거기에 도덕적 기준이나 그런 것은 정말은 없다는 것입니다.
딱히 무엇을 누가 강제적으로 해야 하기 때문에 해야한다는 법은 없습니다. 그럼으로 그가 스스로 부터 그가 선택한것에 자부심을 가지고 있다면 스스에게 투정을 하는 것은 모순입니다. 아무도 강제하지 않앗죠..다 자기 기호대로 자신이 선택해서 길을 가고 그 결과에 스스로 승복할 각오가 있으면 무엇을 추구해도 되는 거이죠...
남의 이목이나 가치판단에 기댈 것은 없습니다.
지구 어둠의 체제가 나쁘다고 누가 그러던가요...더 이상 회피하지 않고 적극적으로 부딪혀 그 어둠을 극복한 다음의 기쁨과 지혜는 말 할수 없이 큰 것입니다.그 겸험의 위대한 필요성이 있기에 어둠 또한 우주에 존재하는 것입니다. 빛과 어둠은 이미 우리들에게 있어 옳고 그르고의 도덕적 문제가 아닙니다.
그런데 여기서 우리가 알아야 할것이, 이 지구에 태어나고 어려운 상황를 맞는 모든 것이 자의로든 타의로든 이미 우리들 스스로가 바로 그 자유의지로 선택한 결과라는 것입니다.카르마란 어찌되었든 자유의지입니다. 적어도 그는 이 지구에 태어날때 그것을 거부하기 위한 어떤 일도 적극적으로 하지 않았습니다. 인간에겐 상위자아와 현재자아가 통일 되지 않고 모순이있습니다. 상위차원에서 어떤 역학대로 필요해서 바라는 것을 현재자아는 불만을 토로하고 투정하기 일수입니다. 자기가 바라는 것을 진저으로 성취 해야 한다면 지금 이 시점부터 지금까지 하던 방식을 모두 멈추고, 앞으로 지구에서 어울려 살아가는 법칙이나 자세를 스스로 개발하지 않으 면 안될 것입니다. 왜냐하면 지금까지 해온 그런 습관의 방식들이 모여져서 현재의 모든 것을 창조하기 때문입니다.
두려워하거나 싫다는 것은 현재 자아의 모순일뿐입니다. 그가 정말로 상위차원에서 어떤 임무를 스스로 부여 받지 않고 단지 싫어하기만 했다면 그는 이미 벌써 이 지구에태어나지 않았을 것입니다. 이미 그의 지구에서 존재가 이 모든 것을 스스로 선택했다는 증거가 되지요.
이 사회에 어울려 산다는 것이 서로 자극을 주어 갈등 극복을 통해 새로운 것은 창조하는 바로 그런한 역활을 하는 것이지만...좋은 모양을 하고 있뜬 아니든 이것도 스스로가 외부의 자극을 통해서 무엇인가를 깨닫는 과정이죠.
그런 의미에서 나를 나무라고 비판하는 혹은, 내가 그를 향해 비판하는 그 상대방은 바로 나 자신의 거울이요..나자신의 환영에 지나지 않습니다.
자기 선택한 것의 결과인 거울을 바라보는, 카르마에 대한 불평은 쓸데 없습니다.
무엇보다도 우리가 처한 위치가 무엇인가요...우리는 최후의 승리를 위해 일단 무엇을 목적으로 삼아야 합니까....
이 모든 게 싫다면 이제 부터라도 지구를 떠나, 혼자서 살아가는 방법을 진정으로 추구해야 겠죠.
무엇을 선택하든 어찌되었던 스스로 선택한 것에 진정한 주인의식을 가지고 있다면, 그 원인과 결과까지도 알고서 행한다면 어둠이나 선이나 빛이나 무엇을 선택하든 후회나 자기 연민이나 불평은 없을 것입니다.
2005.04.29 09:13:54 (*.149.246.221)
많으신 분들이 개체성을 가진 우주들을 만드는 창조들을 하고 계시는 군요! 경이롭습니다.
맞아요 우리가 가진 유일한 도구는 생각하는 것을 현실화 하는 능력이죠. 님이 고민하시는 부분은 아직 님의 마음을 마음대로 사용하시지 못해서 일어나는 일입니다. 그 마음을 님의 친구로 만들어 님만의 세계를 창조하는데 마음껏 사용해 보세요. 그게 미친것이 아닐까라는 두려움은 벗어던지세요. 그게 영적인 의미의 십자가형입니다. 그리고 님만의 새로운 부활을 하세요.
제가 창조하는 우주만이 옳다는것은 부처의 진정한 목적인 다양한 우주의 창조라는 목적에 역행하는 길이고 다만, 많은 분들이 각자의 부활과 역사 가운데서 우주의 다양함을 공유하고 더 나아가 더욱 다채로운 우주의 창조에 기여하는 것이 부처의 진면목이라고 생각합니다.
님 마음을 나라고 생각하지 마시고 관찰해 보시면 많은 것을 느끼실 거예요. 숨을 쉬면서 걸으면서 자기자신의 마음이 어떻게 집착하고 있는지를 살펴보세요.
맞아요 우리가 가진 유일한 도구는 생각하는 것을 현실화 하는 능력이죠. 님이 고민하시는 부분은 아직 님의 마음을 마음대로 사용하시지 못해서 일어나는 일입니다. 그 마음을 님의 친구로 만들어 님만의 세계를 창조하는데 마음껏 사용해 보세요. 그게 미친것이 아닐까라는 두려움은 벗어던지세요. 그게 영적인 의미의 십자가형입니다. 그리고 님만의 새로운 부활을 하세요.
제가 창조하는 우주만이 옳다는것은 부처의 진정한 목적인 다양한 우주의 창조라는 목적에 역행하는 길이고 다만, 많은 분들이 각자의 부활과 역사 가운데서 우주의 다양함을 공유하고 더 나아가 더욱 다채로운 우주의 창조에 기여하는 것이 부처의 진면목이라고 생각합니다.
님 마음을 나라고 생각하지 마시고 관찰해 보시면 많은 것을 느끼실 거예요. 숨을 쉬면서 걸으면서 자기자신의 마음이 어떻게 집착하고 있는지를 살펴보세요.
이를 전통종교가 자신의 (권력, 힘)로 오도하여 굉장히 많은 문제를 발생하고 있는 것도 사실입니다. 여전히 어둠의 포로 인상태이니 무아라는 개념조차 포로입니다. 그런식으로 타인의 성장을 방해하고 있는 것죠...신으로 통하는 개인의 홈통은 오직 개인의 문제이며 그것을 추구하는 일은 누구에게나, 늘상 필요한 일상에서 호흡과도 같은 작은 일일뿐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수행중에 무아로 돌아가야 한다는 수행자의 이상은 그것만으로는 온전하지 못하다고 봅니다. 이 세상에는 카르마를 긍정하고 세상을 긍정하는, 그러한 가르침과 함께 균형을 이루어야 할 명제 또한 있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