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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게시판

1. 안에 있는 우주의 탐구

 

여러분 한 사람 한 사람의 마음 속에는 살아 있는 인간의 의식으로는 도저히 알 수 없을 정도의 거대한 세계, 공간이 펼쳐져 있다는 것을 나는 기회 있을 때마다 이야기해 왔습니다.

예를 들면 『신ㆍ마음의 탐구』라는 서적 속에서는 인간의 마음을 양파 모양의 구조처럼 설명을 한 적도 있습니다. 그러나 여러분은 그런 설명을 들었다고 해도, 아직 그 눈이나 손가락으로 감지할 수 있는 범위에서 물질적, 물리적인 마음의 여러 모양을 감지하고 있는데 지나지 않을 것입니다.

나는 일찍이 이런 말을 사용한 적이 있습니다. 「인간의 본질은 악일점(握一点), 개무한(開無限)」이라고, 쥐면 한 점이 되고 펴면 무한이 되는, 그것이 인간의 본질이라고도 말한 적이 있습니다. 그 의미를 아시겠습니까?

여기서 「인간」이라고 일컬어지는 것은 여러분 한 사람 한 사람입니다. 여러분 한 사람 한 사람이 자기의 본질에 대해, 쥐면 한 점이 되고 펴면 우주의 크기가 된다고 하는 설명을 받아들일 수가 있습니까? 그것을 이해할 수 있다는 자신(自信)이 있습니까? 이것을 아는 것이 금세(今世)에 지상에 살고 있는 인간으로서 최대의 깨달음이기도 하다고 생각합니다.

이 진정한 의미를 실감으로서 붙잡을 수 있을 때, 「자신의 안에 있는 우주」의 탐험인 깨달음의 탐구와 우리를 둘러싼 「자신의 밖에 있는 세계인 다차원 우주」의 탐구, 즉 「안을 향한 탐구」와 「밖을 향한 탐구」는 전혀 다른 방향을 향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최종점에서 일치하는 것입니다. 나는 인간으로서의 「올바른 마음의 탐구」를 늘 제창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초기의 가르침으로서는 「안에서 밖으로」, 「소승(小乘)에서 대승(大乘)으로」라는 이야기도 해 왔습니다. 이 「안을 다진다」는 마음의 움직임과 「밖을 인정하고 밖을 탐구한다」는 벡터(vector)를 전혀 다르게 이해해온 사람이 많으리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여기서 내가 여러분에게 말하고자 하는 것은 「이 안에 있는 벡터와 밖에 있는 벡터를 융합하여 하나로 하라. 이것은 별개의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라」는 것입니다.

자기를 안다는 것은 세계를 안다는 것입니다. 자기를 안다는 것은 부처를 안다는 것입니다. 부처를 안다는 것은 부처가 창조한 세계를 안다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모든 것이 분명해지는 것입니다.

이 글의 테마인 「다차원 우주의 비밀」을 나는 결코 지구 밖에 있는 우주 공간과 같은 세계로서 설명하려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여러분이 자기의 마음이라고 생각했던 그 조그마한 공간의 진정한 비밀을 알아주셨으면 하는 것입니다. 여기서부터 모든 것이 시작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현미경으로 보는 것과 같은 작업일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그 현미경으로 보는 것 같은 작업이 이윽고 망원경으로 보는 것 같은 작업이 되어 모든 것을 아는 일로 이어져 가게 됩니다.

 

 

2. 보살의 경지 --- 사랑의 실천에 의한 자기확대

 

 

행복의 과학이 시작되고 최초의 2년 남짓, 나는 여러분에게 주로 아라한(阿羅漢)이 되기 위한 깨달음의 방법론을 이야기해 왔습니다. 대표적인 예로서 「깨달음의 원리」나 「반성의 원리」 등의 설법에서 아라한의 경지에 도달하고, 나아가 보살로 들어가기 위한 마음가짐에 대해 많은 이야기를 하였습니다.

여기서 하는 이야기는 그 위의 경지에 들어가기 위한 이야기입니다. , 보살(菩薩)로부터 여래(如來)에 들어가기 위한 방법과 마음의 모습을 이야기하려는 것입니다.

나는 「행복의 원리」라는 설법에서 「아라한까지는 누구라도 갈 수 있다. 그리고 그것은 금생(今生)의 노력으로 도달할 수 있는 경지다」라는 말을 했습니다. 그리고 이 아라한의 상태에서 보살에 들어가기 위한 어려움에 대해서는 『석가의 본심』이라는 서적 속에서도 이야기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아라한에서 보살에 들어가는 일은 인간의 혼()을 얻어 수행을 계속해 가는 과정에서 우선 최초이자 최대의 관문입니다. 이 아라한이라고 일컬어지는 제1단계의 깨달음과 그 다음 단계인 보살에 들어가기 위한 깨달음과의 결정적인 차이는 어디에 있는가 하면, 자기라는 존재가 「단순히 자기를 위한 자기가 아니다」라는 것을 진정한 의미에서 납득할 수 있다는 점입니다.

다만 보살 이상의 세계에서는 자기에 대해 전혀 관심도 없고 그것을 이러쿵저러쿵 하는 마음도 없다는 말을 하는 것은 결코 아닙니다. 어디까지나 개성이 주어져 있는 이상, 보살이라 해도 혼()은 각자의 개성에 바탕을 둔 활동을 계속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결정적인 차이는 이 개성이 있는 자기를 자기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자신의 목숨이 자기 것이 아니라고 깨닫고 있다는 말입니다. 이 의미를 아시겠습니까?

단순한 도덕론(道德論)으로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자기의 목숨이 진정한 의미에서 자기 것이 아니라고 아는 일은, 자기 안에 흐르고 있는 혈액이, 피가 아득한 저 편에 있는 부처의 거대한 심장에서 보내져 온다고 실감하는 일입니다.

이것을 실감할 수 없는 한 결코 보살의 경지로 올라갈 수는 없습니다. 그것을 간단히 「무사(無私)인 봉사의 생활」이라고 한 마디로 말하는 사람도 있겠지요. 하지만 그런 분은 무사(無私)이면서 봉사의 생활이라는 것의 진정한 의미를 알고 있는 것일까요? 진정한 무사(無私)란 무엇인지를 알고 있는 것일까요? 바로 그것을 나는 묻겠습니다.

무사(無私)란 결코 타인과 자기 사이의 인간관계의 조정을 위해 그렇게 하는 것이 아닙니다. 「나를 없앤다」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부처의 생명의 일부임을 자각한다」는 데까지 가지 않으면 진정한 의미에서의 무사가 아니라는 말입니다.

그러면 그것을 알기 위해서는 어떻게 하면 좋은지를 생각한 적이 있습니까?

「보살의 세계는 기본적으로 주는 사랑의 세계다. 계속 주는 사랑의 세계다. 무상(無償)의 사랑의 세계다」라고 나는 말해 왔습니다. 그리고 이 사랑이라는 것이 본질적으로 자기자신에게 원래 갖춰져 있는 것이라고 이해할 수 있기 위해서는 사람은 오랜 경험을 필요로 합니다. 지식에 의해 혹은 이념에 의해서만은 결코 사랑은 알 수 없습니다. 사랑이 사랑으로서 홀로 서기 위해서는 반드시 실천을 필요로 합니다.

사랑이 실천을 필요로 한다는 것이 대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아시겠습니까? 그것은 조그마한 육체 속에 한정되고 규정되어 있는 「아무개」라는 인간이 자기의 테두리를 넘어서 자기를 확대하려고 하는 움직임 그 자체라는 뜻입니다.

사랑의 본질은 진정한 부처의 자녀로서의 각자의 자기발전에 있습니다. 각자의 자기발전이 단순한 에고이즘에서 발하고 있다면 그것을 사랑이라고 말하지 않는 것은 물론입니다. 부처의 생명의 일부라고 자기를 인식하고, 그리고 자기를 발전시키려고 하기 때문에 훌륭한 것이 되어가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여러분 중의 많은 분들이 만약에 불법진리(佛法眞理)를 이미 만나서 마음의 먹구름을 걷고 아라한의 경지에 도달해 있다고 한다면, 이제부터 여러분의 노력 목표는 이 사랑의 실천행(實踐行)을 통한 자기확대에 있습니다. 참다운 의미에서 자기를 확대하고 확장한다는 것은 이미 성스러운 사명 아래에 스스로가 있다는 뜻입니다.

그러면 보살의 경지에서 필요한 사랑에 대해 좀 더 자세히 이야기해 보고자 합니다.

우선 「사랑이란 무엇인지 아십니까?」라고 여러분에게 묻겠습니다. 사랑이란 무엇입니까? 나는 지금까지 수없이 이야기해 왔습니다. 써 왔습니다. 여러분은 그것을 듣고 읽었을 것입니다. 그리하여 이해되었습니까?

여러분의 가슴이 뜨거워지지 않는다면 그것은 사랑이 아닙니다. 겉치레 말이 아닙니다. 머리로 생각한 것만이 아닙니다. 혹은 표면상으로만 선()이 되는 것과 같은 행위를 가지고 사랑이라고는 하지 않습니다. 그 염()을 실현하는 과정에서 여러분의 가슴이 뜨거워지지 않는다면 사랑이라고는 하지 않습니다. 뜨거워지기 위해서는 정열이 필요합니다.

이 정열의 근원은 무엇인가 하면, 자기의 혼의 껍질을 타파함으로써 솟아나오는 에너지입니다. 「자기의 껍질」이란 자기한정(自己限定)입니다. 자기를 유한한 인간으로 규정지어 버리는, 태어난 다음부터의 교육이나 환경이나 자질, 혹은 기성관념입니다. 이런 것이 여러분을 속박하고 있습니다. 이 속박을 풀고 이 껍질을 타파하여 무한한 에너지를 방출할 때 사랑은 뜨거운 염()이 되어 흘러나오게 됩니다.

「이 행위를 하는 것은 좋은 일이니까 하는 편이 낫다」거나, 「이것은 그다지 좋지 않으니까 하지 않는 편이 낫다」는 식으로 마음 속에서 머뭇거리고 있는 상황이라면 그런 것은 사랑의 이름을 붙일 가치가 없습니다. 훨씬 더 근원적인 것입니다. 훨씬 더 속 깊은 곳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훨씬 더 힘찬 것입니다. 훨씬 더 깊은 곳에서 나오는 힘입니다. 그 힘이 나오기 위해서는 「자신이 얼마만큼 살려지고 있는가」를 알 필요가 있습니다.

나는 「감사가 없는 사람은 사랑을 모른다」고 말한 적도 있습니다. 자기의 과거를 돌이켜보고 남을 사랑한 적이 없다고 생각되는 사람은, 동시에 남에게 감사한 적도 없겠지요. 혹은 남이랄 것도 없이 천지에, 만물에, 그리고 위대한 부처에 감사한 적이 없을 것입니다.

감사와 사랑은 표리일체(表裏一體)입니다. 자기가 많은 것이 주어져 살려지고 있다는 것을 깨닫는 것은 자기가 무엇을 해야 하는가를 이끌어내게 됩니다. 감사에서 출발한 사랑이야말로 무사(無私)인 것이 되고 무상(無償)인 것이 되어 갑니다.

그러나 이 사랑의 실천은 여러분의 인생의 여러 가지 기로에서 결심을 새롭게 함으로써 실천할 수 있을 것입니다. 다만 그것은 오랜 세월 속에서 변색하고 왜곡되어 가는 수가 있습니다. 이 때문에 필요한 방법으로서 제시된 것이 「팔정도(八正道)」입니다.

나의 서적 가운데 『진설ㆍ팔정도』라는 책이 있습니다만, 이것은 영원한 진리입니다. 이 팔정도가 인도하는 반성은 결코 사랑에서 벗어난 것이 아니라, 여러분이 늘 부처의 마음에 맞는 사랑을 계속 주기 위해서는 이 팔정도에 의해서 스스로를 점검하여 궤도 수정할 필요가 있습니다.

따라서 보살의 수행의 제2단계로서는 아직 이 팔정도가 따라오게 됩니다. 주는 사랑의 실천에 있어 아직 팔정도에 의한 궤도 수정에서 벗어날 수는 없습니다. 보살의 단계에서는 아직 이 팔정도가 필요합니다.

그렇지만 사랑의 실천과 팔정도 양쪽을 되풀이하는 동안에, 여러분은 나아가 그 다음의 진실을 깨닫기에 이르게 됩니다.

사랑의 실천과 팔정도를 실천하는 동안에 「육바라밀(六波羅密)」이라는 수행에 생각이 미치게 됩니다. 이 육바라밀의 수행은 보살에서 범천(梵天)으로 향해 갈 때에 무엇보다도 필요한 수행이 됩니다. 그것은 아라한의 단계에서의 팔정도가 아직 자기완성을 중심으로 하는 데에 대하여, 육바라밀의 단계에서는 「이타(利他)」로 상당한 중점이 옮겨가며, 이 이타로 중점이 옮겨갈 때 자기를 보다 적극적으로 충분히 살릴 수 있는 길을 추구하기 때문입니다. 자세히는 『황금의 법』이라는 서적 속에 설명되어 있습니다.

 

 

3. 범천(梵天)의 경지 --- 일이 곧 자기

 

 

그러나 내가 여기서 가르쳐 드리고자 하는 것은 이 보살의 윗단계에 있는 범천의 경지입니다.

이 범천이란 대체 무엇인가? 이것은 보살과 여래의 중간적인 영역을 말합니다. 또 본래는 여래의 영격(靈格)을 가지고 있지만 역할로서 보살의 일을 담당하는 사람을 범천이라고도 합니다.

이 범천의 경지에서는 실은 인간으로서 자기를 발휘하는 방법에 결정적인 차이가 있습니다. 여러분이 보살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의 활동은 지상에서 살고 있는 여러분과 마찬가지로 인간으로서의 의식, 육체적인 의식도 일부에는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 위의 범천의 경지에서는 여러분이 자기의 손이나 발이나 얼굴이라고 생각하는 의식을 이미 사용하지 않고 자기를 인식하는 사람들이 나타납니다.

그들은 여러분이 지상에 있으면서 생각하듯이, 인간으로서의 모습이 있고 모습이 있는 인간이 일을 한다는 것이 아니라, 「일 그 자체가 자기다」라는 인식을 하고 있습니다. 이것을 아시겠습니까?

여러분도 일에 몰두할 때가 있을 것입니다. 그 일이 자신의 천직이라고 할 만한 일일 경우 혹은 무아경(無我境)이 되었을 때 자기를 잊어버리는 경우가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대부분은 일시적인 것이어서 오래는 계속되지 않을 것입니다.

하지만 이 범천의 경지는 그렇지가 않습니다. 그들이 범천인 것은 그들은 자기가 하는 일 그 자체가 자기라고 느끼고 있기 때문입니다. , 「내가 하는 일」이 나이며 그 밖의 나라는 존재는 없다는 것입니다. 「그 밖의 나」란 사적(私的), 완전히 인간적인 영역을 말합니다. 범천들은 이미 이 사적인 부분이 없어진 상태입니다. 그것은 24시간이 일이 되어 있는 사람들의 모습입니다. 24시간이 일이란 어떤 뜻인가? 그것은 자기의 모든 생명을 성스러운 목적을 위해 쓰고 있다는 뜻입니다.

돌이켜 보아 여러분 한 사람 한 사람이 자신의 하루 24시간 혹은 과거 수십 년을 회고할 때 어떻습니까? 지금 배우기 시작한 이 불법진리(佛法眞理)의 기준에 비추어 본다면 그 하루의 시간 혹은 수십 년의 시간의 대체 몇 퍼센트를 불법진리를 위해 혹은 불법진리에 맞는 생활을 위해 썼습니까?

「인생의 태반이 그러했다」라고 잘라 말할 수 있는 사람이 얼마나 있을까요?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그 퍼센티지(비율)는 적어질 것입니다. 그 퍼센티지가 적다는 것 자체가 여러분의 혼의 경지가 현재 어디쯤 있는지를 보여줍니다.

범천의 경지에 이르기 위해서는 자기의 목숨을 전부 불법진리를 위해 쓰고, 수백 년, 수천 년의 혼() 생활을 보내도 후회가 없다는 심경이 아니면 안됩니다. 단순히 좋아한다는 것이 아니라, 그 일이 혼을 뒤흔들 정도의 기쁨을 수반하는 것이지 않으면 안됩니다.

조그만 예를 든다면 여러분이 불법진리 서적을 읽는 자세 그 자체에도 차이가 있습니다.

어떻게든 배우지 않으면 안된다, 공부하지 않으면 안된다는 생각, 이 「않으면 안된다」에 바탕을 두고 배우는 사람. 혼의 양식으로서 아무래도 필요하다고 해서 배우는 사람. 진리를 안다는 것이 얼마나 기쁨을 가져오는가를 알고서 배우는 사람. 배움은 곧 행위로 이어진다고 생각하고 읽는 사람. 서적 속에는 자기가 하지 않으면 안되는 내용이 쓰여 있다고 생각하여, 그것을 흡수하고 실천하는 일이 혼의 기쁨이라고 해서 읽는 사람. 이와 같이 차이는 여러 가지일 것입니다. 이 자세 속에 여러분들의 혼의 편린(片鱗)이 나타나 있습니다.

그 물고기가 무슨 물고기인지는 비늘 한 개를 뽑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그 온몸을 다 볼 필요는 없습니다. 수염을 보지 않아도 잉어의 비늘은 잉어의 비늘입니다. 붕어의 비늘은 붕어의 비늘, 도미의 비늘은 도미의 비늘입니다.

여러분이 어떤 존재인지는 진리를 향해 대응하는 방법을 보면 그 순간에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자신의 혼의 본바탕이 어떤 것인지는 여기에 서술해 온 것을 참고로 자문자답하면 결론이 나올 터입니다.

아직도 아득히 수행의 과정이 있다고 생각되는 사람은 오늘부터 마음을 바꿀 일입니다. 그리고 자신의 비늘 하나가 위대한 빛을 발하고 있다고 느끼는 사람은 그러면 이제부터 무엇을 하겠는가?
잉어는 잉어로서의, 도미는 도미로서의 헤엄치는 방식이 있으리라. 그 헤엄치는 방식을 깨우쳐라. 자기가 하지 않으면 안될 일을 알라
.
그것이 중요한 것입니다
.
출발점으로서 자신의 혼의 편린이 무엇을 이야기하고 있는지를 알고, 그리고 오늘부터 모든 의미에서, 모든 입장에서 한 걸음 전진, 두 걸음 전진해 가는 것이 중요합니다.

 

 

4. 일즉다(一卽多)의 인식

 

 

보살의 윗단계에 범천이라는 경지가 있고, 범천은 자기의 모습이나 형태에 얽매이지 않고 일 그 자체를 자기라고 파악한다고 했습니다. 이 의미에서 범천의 단계부터는 이미 인간으로서의 테두리는 초월해 있다고 해도 좋겠지요.

그리하여 「일 그 자체가 자기다」라는 관점에 설 때 커다란 변화가 나타납니다. 그것은 인식으로서는 상당히 어려운 일입니다만….

지상적(地上的)인 인식으로는 한 사람의 일이란 가령 1 1로 만나서 이야기를 한다고 하는 한계가 있는 활동입니다. 이것이 지상적인 일입니다. 1 1로 이야기를 하는 것 이외에는 생각이 나지 않는 것이 지상인의 일의 실제입니다.

물론 복수(複數)의 사람과 이야기를 할 수도 있지만, 지상적인 인식이라는 의미로 설명을 하면 지상의 인간은 「사람은 동시에 한 사람하고 밖에 이야기할 수 없다」라는 식으로 자기한정을 하고 있습니다. 왜냐 하면 입은 하나밖에 없고, 눈은 앞으로 밖에 향해 있지 않고, 귀도 두 개 밖에 없으니까 눈 앞의 사람하고만 이야기할 수 있게 되어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고차원 세계인 7차원 보살계의 상단계(上段階)에 오면 그렇지 않게 됩니다. 예를 들면 내가 5만 명에게 강연하는 일은 3차원적으로 본 경우에는 내 모습이 5만 명 있는 것과 똑같이 보일 것입니다. 지상인의 견해라면 5만 명의 내가 존재하여 일을 하는 것과 똑같아진다는 인식입니다.

상대방의 사람들은 모두 1 1로 나와 이야기를 하고 있는 셈이다. 그런데 동시에 내가 이야기를 하는 사람은 5만 명이 있다. 이것은 지상 세계이기 때문에 5만 명이 있고, 5만 명이 나를 보고, 내가 5만 명의 사람을 본다는, 그런 집단으로 이야기를 하는 모습이 되어 있지만, 실재계에서는 그렇지 않습니다. 각각 한 사람이 1 1로 나와 이야기를 하는 줄로 알면서 동시에 이만큼이나 많은 사람들과 이야기를 하는 일이 가능합니다.

그것은 인식의 출발점이 이미 이 육체에 없기 때문에, 이런 모습이라는 물리적 한계가 없기 때문에, 5만 명과 이야기를 하는 일 그 자체가 나의 진정한 모습이라는 뜻입니다.

여러분은 이 인식의 전환에 대해 이해하겠습니까? 여기서 이해할 수 없게 되면 다차원 우주까지 갈 수가 없습니다. 여기에서 퇴전(退轉)한 사람은 다시 한 번 아라한부터 배워 주십시오. 우주론(宇宙論)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이런 인식의 전환이 필요합니다.

인간은 아무래도 자기를 기준으로 해서 밖에 생각하지 못합니다. 여러분은 자기라는 존재를 다른 관점에서 볼 수가 있겠습니까?

가령 자기가 많은 사람들을 수용할 수 있는 대강당이라고 생각할 수 있겠습니까? 자기가 강당이라고 하고서 수만 명의 사람들을 받아들여서 강연회를 개최하고 있다 --- 이와 같은「관()의 전회(轉回)」를 할 수 있겠습니까? 이것을 할 수 있으면 여러분은 인간적 시야에서 떠나는 일이 가능해집니다. , 지상적인 속성에서 떠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또 범천의 경지에서는 영적(靈的) 능력이 상당히 다르다는 이야기도 한 적이 있습니다. 이 범천 부근부터 「관자재력(觀自在力)」이 매우 강해진다는 이야기를 했습니다. 관자재력이 정말로 힘을 얻게 되는 것은 이 범천의 경지에서부터입니다.

 

 

5. 우주즉아(宇宙卽我)

 

 

그리하여 관자재력이 다다르는 곳은 대우주를 아는 일이라고도 말씀드렸습니다. , 대우주를 알기 위해서는 인식의 전환을 할 수가 있다는 것이 전제로서 아무래도 필요합니다. 자기를 강당으로 삼아서 강연회를 본다는 이야기를 했습니다만, 이것을 더욱 확대해 보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 여러분은 우주가 될 수 있다는 뜻입니다. 이것을 더욱 더 확대하면 대우주가 될 수 있습니다. 대우주 그 자체가 되어서 대우주의 안에 있는 세계를 볼[] 수가 있는 가능성을 시사하는 것입니다.

과거에 「우주즉아(宇宙卽我)」라는 체험을 한 사람이 몇 사람인가 있습니다. 그 점에 대해서도 이미 몇 번인가 언급하였습니다. 그리고 이 우주즉아의 경지에도 3단계가 있다고 말했습니다.

1단계의 우주즉아는 좁은 의미의 태양계(太陽界), 즉 여래계(如來界)의 상단계(上段階)에서 얻어지는 우주즉아입니다. 그것은 소크라테스와 같은 여래가 일찍이 경험했던 일입니다.

소크라테스가 이 우주즉아를 경험했다는 것은 후에 제자인 플라톤이 쓴 『파이돈(Phaidon)』이라는 책 속에 분명히 쓰여져 있습니다. 그에게는 아득한 상공에서 지구의 모습을 내려다 본 체험이 분명히 있었던 것입니다. 그 일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그의 우주즉아란 육체를 이 지상에 놓아두고서 혼()이 이 육체를 떠나 한없이 상승하고 확대되어 지구를 눈 아래로 내려다보아 지구가 조그만 공처럼 보인다는 의미에서의 우주즉아였습니다.

8차원 여래계라 일컬어지는 세계에서의 우주즉아는 지구라는 관점, 지구를 상정하지 않으면 아무래도 불가능하다는 한계가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위의 제2단계의 우주즉아로서 「은하즉아(銀河卽我)」라는 경지가 있었습니다. 이 은하즉아라는 경지는 자기의 의식이 은하계의 크기로까지 확대되어 지구가 조그마한 세포로 보이는 경지입니다.

더 나아가 이 위에 있는 제3단계의 우주즉아는 어떤 경지인가 하면, 대우주가 하나의 생물처럼 보이는 경지입니다. 이것은 여러분이 극히 작은 마이크로(micro, 미시적) 인간이 되어서 자기의 인체(人體)에 들어가 있는 모습을 생각해 보면 상상하는 것도 그리 어렵지 않을 것입니다. 바이러스와 같은 모습이 되어 자기의 육체 속에 들어가 자기를 관철한다면 어떻게 보이겠습니까? 그것은 거대한 우주 공간이면서 각각의 기능을 가진 부분들이 모여 있는 모습입니다.

이 제3단계의 우주즉아의 경지에 도달하면, 가령 여러분이 「은하」라고 부르는 부분[사실은 은하라고 일컬어지는 것은 아주 많이 존재합니다만], 지구에서 본 은하라고 일컬어지는 부분 등은 하나의 심장처럼 보입니다. 분명히 심장처럼 보입니다. 그리고 「태양계(太陽系)」라는 태양을 중심으로 하는 혹성군(惑星群) 등은 하나의 동맥처럼 보이게 됩니다.

우주의 중심부에서 부처의 에너지, 빛이 보내져 와, 은하라는 심장을 통하여 다시 태양계 쪽으로 힘차게 보내져서 태양을 중심으로 하여 지구나 금성이나 그 밖의 혹성으로 이어지는 대동맥으로 흘러가는 모습이 보입니다.

여러분이 천체망원경 등으로 보는 우주는 조그마한 별의 모여 있는 모습이고 나머지는 진공처럼 보일 것입니다. 하지만 영적(靈的)인 눈으로 볼 때는 이것이 하나의 생물로 보입니다. 커다란 목적을 가지고 움직이는 몸처럼 보이게 됩니다.

예를 들면, 그 몸의 오른손 부분이 올라가면 그 별무리[星群]에서 커다란 변동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그리고 새로운 별이 생겨나거나 새로운 태양계(太陽系)가 생겨납니다. 또 병으로 인해서 육체의 여러 부분들이 사용할 수 없게 되는 일이 있습니다만, 그런 때란 하나의 별의 죽음 혹은 그 별을 중심으로 하는 혹성군들이 죽어 가는 모습이, 사라져 가는 모습에 해당합니다.

또 블랙홀은 일종의 암세포로 보입니다. 그것은 영적인 눈으로 보아도 마치 암세포와 마찬가지로 검게 그을려 어두컴컴한 형태로 보입니다. 그것은 실로 암세포이어서 거기에 다가간 것들의 목숨을 빼앗아 갑니다. 다가가는 것이란 무엇이겠습니까? 그것은 그 블랙홀에 가까운 별들[이것은 은하 속에서 말하자면 세포입니다]이며, 암세포에 가까운 곳의 세포는 잇달아서 침식되어 빨려 들어갑니다. 이런 암세포와 같은 블랙홀이 있습니다.

, 이런 은하계 우주라고 하는 광대한 세계 속에서 매우 기능적인 몸을 만들고 있는 셈입니다만, 인간의 육체도 여러 부분에 고장이 생기거나 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여러 은하를 발판으로 하여 활동하는 동안에, 그와 같이 위대한 부처로부터 갈라져 나온 몸일지라도 병드는 부분이 나타납니다. 이 병드는 부분이 무엇인가 하면 상극(相剋)을 이루는 부분입니다.

각각의 혹성 집단 속에는 한가지 목표가 있습니다. 커다란 별의 무리들 속에는 한 가지 진화의 목표가 있습니다. 지구를 중심으로 하는 태양계에는 태양계로서의 목표가 있고, 이상이 있고, 그것은 다른 태양계와는 다른 내용입니다.

이 지구를 중심으로 하는 태양계의 목표는 무엇인가 하면, 현시점에서 가장 중심인 목표는 두 가지가 있습니다. 첫째는 한없이 지()를 높여가는 일입니다. 지적(知的)인 진화를 하나의 커다란 목표로 내걸고 있습니다. 또 하나는 지적인 진화와 동시에 대조화(大調和), 조화를 실현하는 일입니다. 이것은 미()로 이어져 가는 것입니다. 이 「지()」와「미()」라는 두 가지를 목표로 내걸고 있습니다.

그러나 다른 은하, 다른 태양계에서는 전혀 다른 목표에 바탕을 두고 활동하는 존재들이 있습니다. 이런 집단군(集團群)이 서로 겹치는 곳에서 하나의 알력이 생기고 그것이 블랙홀화()하는 수가 흔히 있습니다.

이것이 제3단계의 우주즉아에서의 인식입니다.

이와 같은 우주즉아의 한 단계 더위의 경지로서 「불즉아(佛卽我)」라고 일컬어지는 경지가 있습니다. 이 불즉아의 경지가 되면 좀 더 인식이 앞서게 됩니다.

3단계의 우주즉아에서는 이 대우주가 부처의 몸으로서, 심장이나 내장이나 혹은 여러 가지 혈관처럼 보였던 것이 한층 시야를 높여 가면 이미 여러분이 보고 있는 이 대우주 자체가 하나의 구체(球體)처럼 보이게 됩니다. 그것은 구체입니다. 조그마한 공처럼 보입니다.

그리고 이런 구체가 한층 더 큰 대우주 속에 몇 개인가 떠 있는 것이 보입니다. 이 구체를 만들고 있는 것은 13차원 우주라 일컬어지는 세계입니다. 13차원 우주를 한 차원 높은 14차원 이후의 세계에서 보면 정말로 공입니다. 공처럼 되어서 떠 있습니다.

그리고 여러분은 상상할 수 있을 것입니다만, 이 공이 또 각각 잘 통합되어서 그 다음 질서를 형성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각각으로 떠 있는 공이 하나로 통합되어서 앞서의 은하계와 마찬가지로 보다 큰 우주에서의 심장을 만들거나 신장이나 위장을 만들거나 두뇌를 만들고 있습니다.

그러면 한층 더 높은 차원인 14차원 이후의 대우주에서 볼 때, 지금 여러분이 살고 있는 지구가 속한 13차원의 우주의 공[구체]은 대체 어느 부분에 해당하겠습니까? 여러분이 지금 살고 있는 곳은 한 단계 더 커다란 우주에서 볼 때, 육체로 말하면 마치 「눈」의 부분에 해당됩니다. 오른쪽 눈에 해당되는 부분에 위치합니다.

, 여러분이 살고 있는 세계는 14차원 이후의 우주에서 본다면 눈에 해당됩니다. 이 눈을 만들고 있는 세포 하나 하나가 조그마한 여러분의 눈으로 보면 광대한 별무리[星群]입니다만, 그와 같은 우주입니다. 그런 세계입니다.

왜 여러분의 세계가 눈에 해당되는 것이겠습니까? 즉 여러분이 살고 있는 이 대우주는 부처가 창조한 세계를 보기 위한 「창()」의 역할을 맡고 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이 살고 있는 이 우주를 통해서 다른 모든 세계가 아주 알기 쉽게 되어 있습니다.

즉 여러분이 살고 있는 우주 공간이란 부처가 창조한 세계 속에서는 하나의 대표 작품입니다. 부처가 이상(理想)으로 삼는 갖가지 요소를 여기에 다 모아 놓은 것입니다. 그것이 모형 정원처럼 되어, 그 속에서 여러 가지 유형, 모델이 되는 사건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그런 세계라는 뜻입니다.

 

 

6. 태양계 영단의 사명

 

 

여기까지 말씀드리면 지구계 영단(地球系 靈團), 태양계 영단(太陽系 靈團)의 사명을 대강은 알게 되리라고 생각합니다. 여러분은 매우 긍지 높은 혼()의 그룹입니다. 여러분이 살고 있는 우주는 한층 더 큰 우주에서 보더라도 대단히 기대되고 있는 그룹입니다. 이 속의 은하의, 이 속의 태양계에 살고 있는 여러분은 부처로부터 몹시 기대 받고 있는 그룹입니다. 혼의 집단입니다. 그것은 보다 매크로(macro, 거시적)의 견지에서 보더라도 확실하게 말할 수 있는 일입니다.

이 일은 결코 지구에 살고 있다고 해서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보다 더 커다란 우주적 관점에서 보더라도 지금 우리의 혼 그룹들은 상당히 전진한 커다란 이상을 가진 그룹이라는 말입니다.

그런 여러분이 지금 20세기[본 강연 당시]에 대거로 육체를 가지고 살고 있습니다. 이 의미를 알아주십시오. 우리의 이번 일은 얼마만큼이나 커다란 사명을 띤 것인가, 20세기에 육체를 가지고 지금 대호령(大號令) 아래에, 이 커다란 운동 아래에 여러분이 모여들었다는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라는 것, 그것을 알아주십시오.

그것은 대우주의 거대한 세계에서 보면 이미 몇 조() 분의, 아니 그 몇 조 분의 몇 조 분의 몇 조 분의 1정도의 확률이지만, 그러나 그것은 확실히 선택된 혼들임은 사실입니다. 우연이 아니라 필연적으로 선택 받은 혼이라는 뜻입니다.

이 사실을 알았을 때 가만히 앉아 있어도 되는가? 잠자고 있어도 되는가? 깨우치지 않아도 되는가? 행동하지 않아도 되는가? 지금 일어서지 않아도 되는가? 여러분은 그것으로 인생을 완수할 수 있다고 생각하고 있는가?

단순한 육체 인간이 아닌, 그 정도로 위대한 사명을 가지고 태어난 여러분이라면 대체 얼마만큼의 활약이 기대되고 있다고 생각합니까?

지금 이후로 단순한 인간임을 그만두십시오. 여러분은 그런 다차원 우주 속에서 매우 드문 확률 아래에 기대 받고 있는 혼으로서 대체 얼마만큼의 활약을 해야 하겠는가? 다른 혹성에 있는 사람들에 비해서도 극히 유리한, 혜택 받은 환경에 있습니다. 이 환경에 있으면서 나태한 삶을 사는 것은 용서되지 않습니다. 후퇴는 용서되지 않습니다.

부디 명심해서 이 커다란 사명을 깨닫고 이제부터 함께 정진해 갑시다.


( 1989
년도 제3회 대강연회, 1989년 5월 2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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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06.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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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라

2011.06.23
10:41:55
(*.34.108.88)

글이 길어서 속도으로 읽어지만 부분 부분 중요한 대목도 있고 어느 정도 진정성은 있는 글 같네요...제 개인적으로 이런 글은 얼마든지 환영합니다...^^ 여기가 그러라고 있는 곳이니까 맘 놓고 올려 된다고 봅니다...

베릭

2011.07.14
21:52:41
(*.156.160.16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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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차원 우주(多次元 宇宙)의 비밀

andromedia

 

. 안에 있는 우주의 탐구

 

한 사람 한 사람의 마음 속에는 거대한 세계, 공간이 펼쳐져 있다

인간의 마음을 양파 모양의 구조처럼 설명을 한 적도 있다.

인간의 본질은 악일점(握一点), 개무한(開無限)」이라고,

쥐면 한 점이 되고 펴면 무한이 되는, 그것이

인간의 본질이라고도 말한 적이 있습니다. 그 의미를 아시겠습니까?

여기서 「인간」이라고 일컬어지는 것은  한 사람 한 사람입니다.

한 사람 한 사람이 자기의 본질에 대해, 쥐면 한 점이 되고 펴면 우주의 크기가 된다.

이것을 아는 것이 금세(今世)에 지상에 살고 있는 인간으로서 최대의 깨달음이기도 합니다.

이 진정한 의미를 실감으로서 붙잡을 수 있을 때,

「자신의 안에 있는 우주」의 탐험인 깨달음의 탐구와

우리를 둘러싼 「자신의 밖에 있는 세계인 다차원 우주」의 탐구,

즉 「안을 향한 탐구」와 「밖을 향한 탐구」는

전혀 다른 방향을 향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최종점에서 일치하는 것입니다.

나는 인간으로서의 「올바른 마음의 탐구」를 늘 제창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초기의 가르침으로서는 「안에서 밖으로」,

「소승(小乘)에서 대승(大乘)으로」라는 이야기도 해 왔습니다.  

「안을 다진다」는 마음의 움직임과 「밖을 인정하고 밖을 탐구한다」는

벡터(vector)를 .....이 안에 있는 벡터와 밖에 있는 벡터를 융합하여 하나로 하라.

이것은 별개의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라」는 것입니다.

자기를 안다는 것은 세계를 안다는 것입니다. 자기를 안다는 것은 부처를 안다는 것입니다.

부처를 안다는 것은 부처가 창조한 세계를 안다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모든 것이 분명해지는 것입니다.

 자기의 마음이라고 생각했던 그 조그마한 공간의 진정한 비밀을 알아주셨으면 하는 것입니다.

여기서부터 모든 것이 시작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현미경으로 보는 것과 같은 작업일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그 현미경으로 보는 것 같은 작업이 이윽고

망원경으로 보는 것 같은 작업이 되어 모든 것을 아는 일로 이어져 가게 됩니다.

 

 

2. 보살의 경지 --- 사랑의 실천에 의한 자기확대

 

행복의 과학이 시작되고 최초의 2년 남짓, 나는 여러분에게 주로

아라한(阿羅漢)이 되기 위한 깨달음의 방법론을 이야기해 왔습니다.

대표적인 예로서 「깨달음의 원리」나 「반성의 원리」 등의 설법에서

아라한의 경지에 도달하고,

나아가 보살로 들어가기 위한 마음가짐에 대해 많은 이야기를 하였습니다.

여기서 하는 이야기는 그 위의 경지에 들어가기 위한 이야기입니다.

, 보살(菩薩)로부터

여래(如來)에 들어가기 위한 방법과 마음의 모습이야기하려는 것입니다.

나는 「행복의 원리」라는 설법에서 「아라한까지는 누구라도 갈 수 있다.

그리고 그것은 금생(今生)의 노력으로 도달할 수 있는 경지다」라는 말을 했습니다.

그리고 이 아라한의 상태에서 보살에 들어가기 위한 어려움에 대해서는

『석가의 본심』이라는 서적 속에서도 이야기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아라한에서 보살에 들어가는 일은 인간의 혼()을 얻어 수행을 계속해 가는 과정에서

우선 최초이자 최대의 관문입니다.

 

이 아라한이라고 일컬어지는 제1단계의 깨달음과 그 다음 단계인 보살에 들어가기 위한

깨달음과의 결정적인 차이는 어디에 있는가 하면,

자기라는 존재가 「단순히 자기를 위한 자기가 아니다」라는 것을

진정한 의미에서 납득할 수 있다는 점입니다.

 

다만 보살 이상의 세계에서는 자기에 대해 전혀 관심도 없고

그것을 이러쿵저러쿵 하는 마음도 없다는 말을 하는 것은 결코 아닙니다.

어디까지나 개성이 주어져 있는 이상,

보살이라 해도() 각자의 개성에 바탕을 둔 활동을 계속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결정적인 차이는 이 개성이 있는 자기를 자기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자신의 목숨이 자기 것이 아니라고 깨닫고 있다는 말입니다. 이 의미를 아시겠습니까?

단순한 도덕론(道德論)으로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자기의 목숨이 진정한 의미에서 자기 것이 아니라고 아는 일은,

자기 안에 흐르고 있는 혈액이, 피가

아득한 저 편에 있는 부처의 거대한 심장에서 보내져 온다고 실감하는 일입니다.

이것을 실감할 수 없는 한 결코 보살의 경지로 올라갈 수는 없습니다.

그것을 간단히 「무사(無私)인 봉사의 생활」이라고 한 마디로 말하는 사람도 있겠지요.

하지만 그런 분은 무사(無私)이면서 봉사의 생활이라는 것의 진정한 의미를

알고 있는 것일까요?

진정한 무사(無私)란 무엇인지를 알고 있는 것일까요? 바로 그것을 나는 묻겠습니다.

무사(無私)란 결코 타인과 자기 사이의 인간관계의 조정을 위해 그렇게 하는 것이 아닙니다.

「나를 없앤다」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부처의 생명의 일부임을 자각한다」는 데까지 가지 않으면

진정한 의미에서의 무사가 아니라는 말입니다.

그러면 그것을 알기 위해서는 어떻게 하면 좋은지를 생각한 적이 있습니까?

「보살의 세계는 기본적으로 주는 사랑의 세계다.

계속 주는 사랑의 세계다. 무상(無償)의 사랑의 세계다」라고

 나는 말해 왔습니다.

그리고 이 사랑이라는 것이 본질적으로 자기자신에게 원래 갖춰져 있는 것이라고

이해할 수 있기 위해서는 사람은 오랜 경험을 필요로 합니다.

지식에 의해 혹은 이념에 의해서만은 결코 사랑은 알 수 없습니다.

사랑이 사랑으로서 홀로 서기 위해서는 반드시 실천을 필요로 합니다.

사랑이 실천을 필요로 한다는 것이 대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아시겠습니까?

그것은 조그마한 육체 속에 한정되고 규정되어 있는 「아무개」라는 인간이

자기의 테두리를 넘어서 자기를 확대하려고 하는 움직임 그 자체라는 뜻입니다.

 

사랑의 본질은 진정한 부처의 자녀로서의 각자의 자기발전에 있습니다.

각자의 자기발전이 단순한 에고이즘에서 발하고 있다면

그것을 사랑이라고 말하지 않는 것은 물론입니다.

부처의 생명의 일부라고 자기를 인식하고,

그리고 자기를 발전시키려고 하기 때문에 훌륭한 것이 되어가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여러분 중의 많은 분들이

만약에 불법진리(佛法眞理)를 이미 만나서 마음의 먹구름을 걷고

아라한의 경지에 도달해 있다고 한다면, 이제부터 여러분의 노력 목표는

이 사랑의 실천행(實踐行)을 통한 자기확대에 있습니다.

참다운 의미에서 자기를 확대하고 확장한다는 것은

 이미 성스러운 사명 아래에 스스로가 있다는 뜻입니다.

 

그러면 보살의 경지에서 필요한 사랑에 대해 좀 더 자세히 이야기해 보고자 합니다.

우선 「사랑이란 무엇인지 아십니까?」라고 여러분에게 묻겠습니다. 사랑이란 무엇입니까?

나는 지금까지 수없이 이야기해 왔습니다. 써 왔습니다.

여러분은 그것을 듣고 읽었을 것입니다.

그리하여 이해되었습니까?

여러분의 가슴이 뜨거워지지 않는다면 그것은 사랑이 아닙니다.

겉치레 말이 아닙니다. 머리로 생각한 것만이 아닙니다.

혹은 표면상으로만 선()이 되는 것과 같은 행위를 가지고 사랑이라고는 하지 않습니다.

그 염()을 실현하는 과정에서

여러분의 가슴이 뜨거워지지 않는다면 사랑이라고는 하지 않습니다.

뜨거워지기 위해서는 정열이 필요합니다.

이 정열의 근원은 무엇인가 하면, 자기의 혼의 껍질을 타파함으로써 솟아나오는 에너지입니다.

「자기의 껍질」이란 자기한정(自己限定)입니다. 자기를 유한한 인간으로 규정지어 버리는,

태어난 다음부터의 교육이나 환경이나 자질, 혹은 기성관념입니다.

이런 것이 여러분을 속박하고 있습니다. 이 속박을 풀고 이 껍질을 타파하여

무한한 에너지를 방출할 때 사랑은 뜨거운 염()이 되어 흘러나오게 됩니다.

「이 행위를 하는 것은 좋은 일이니까 하는 편이 낫다」거나,

「이것은 그다지 좋지 않으니까 하지 않는 편이 낫다」

는 식으로 마음 속에서 머뭇거리고 있는 상황이라면

그런 것은 사랑의 이름을 붙일 가치가 없습니다.

 

훨씬 더 근원적인 것입니다. 훨씬 더 속 깊은 곳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훨씬 더 힘찬 것입니다. 훨씬 더 깊은 곳에서 나오는 힘입니다.

그 힘이 나오기 위해서는 「자신이 얼마만큼 살려지고 있는가」를 알 필요가 있습니다.

 

나는 「감사가 없는 사람은 사랑을 모른다」고 말한 적도 있습니다.

자기의 과거를 돌이켜보고 남을 사랑한 적이 없다고 생각되는 사람은,

동시에 남에게 감사한 적도 없겠지요.

혹은 남이랄 것도 없이 천지에, 만물에, 그리고 위대한 부처에 감사한 적이 없을 것입니다.

 

감사와 사랑은 표리일체(表裏一體)입니다.

자기가 많은 것이 주어져 살려지고 있다는 것을 깨닫는 것은

자기가 무엇을 해야 하는가를 이끌어내게 됩니다.

감사에서 출발한 사랑이야말로 무사(無私)인 것이 되고 무상(無償)인 것이 되어 갑니다.

그러나 이 사랑의 실천은

여러분의 인생의 여러 가지 기로에서 결심을 새롭게 함으로써 실천할 수 있을 것입니다.

다만 그것은 오랜 세월 속에서 변색하고 왜곡되어 가는 수가 있습니다.

 

이 때문에 필요한 방법으로서 제시된 것이 「팔정도(八正道)」입니다.

나의 서적 가운데 『진설ㆍ팔정도』라는 책이 있습니다만, 이것은 영원한 진리입니다.

이 팔정도가 인도하는 반성은 결코 사랑에서 벗어난 것이 아니라,

여러분이 늘 부처의 마음에 맞는 사랑을 계속 주기 위해서는

이 팔정도에 의해서 스스로를 점검하여 궤도 수정할 필요가 있습니다.

따라서 보살의 수행의 제2단계로서는 아직 이 팔정도가 따라오게 됩니다.

주는 사랑의 실천에 있어 아직 팔정도에 의한 궤도 수정에서 벗어날 수는 없습니다.

보살의 단계에서는 아직 이 팔정도가 필요합니다.

그렇지만 사랑의 실천과 팔정도 양쪽을 되풀이하는 동안에,

여러분은 나아가 그 다음의 진실을 깨닫기에 이르게 됩니다.

사랑의 실천과 팔정도를 실천하는 동안에

「육바라밀(六波羅密)」이라는 수행에 생각이 미치게 됩니다.

이 육바라밀의 수행은

보살에서 범천(梵天)으로 향해 갈 때에 무엇보다도 필요한 수행이 됩니다.

그것은 아라한의 단계에서의 팔정도가 아직 자기완성을 중심으로 하는 데에 대하여,

육바라밀의 단계에서는 「이타(利他)」로 상당한 중점이 옮겨가며,

이 이타로 중점이 옮겨갈 때 자기를 보다 적극적으로 충분히 살릴 수 있는 길을

추구하기 때문입니다.

자세히는 『황금의 법』이라는 서적 속에 설명되어 있습니다.

 

 

3. 범천(梵天)의 경지 --- 일이 곧 자기

 

그러나 내가 여기서 가르쳐 드리고자 하는 것은 이 보살의 윗단계에 있는 범천의 경지입니다.

이 범천이란 대체 무엇인가? 이것은 보살과 여래의 중간적인 영역을 말합니다.

또 본래는 여래의 영격(靈格)을 가지고 있지만

역할로서 보살의 일을 담당하는 사람을 범천이라고도 합니다.

이 범천의 경지에서는 실은 인간으로서 자기를 발휘하는 방법에 결정적인 차이가 있습니다.

여러분이 보살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의 활동은 지상에서 살고 있는 여러분과 마찬가지로

인간으로서의 의식, 육체적인 의식도 일부에는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 위의 범천의 경지에서는

여러분이 자기의 손이나 발이나 얼굴이라고 생각하는 의식을

이미 사용하지 않고 자기를 인식하는 사람들이 나타납니다.

그들은 여러분이 지상에 있으면서 생각하듯이,

인간으로서의 모습이 있고 모습이 있는 인간이 일을 한다는 것이

아니라, 「일 그 자체가 자기다」라는 인식을 하고 있습니다. 이것을 아시겠습니까?

여러분도 일에 몰두할 때가 있을 것입니다.

그 일이 자신의 천직이라고 할 만한 일일 경우 혹은 무아경(無我境)이 되었을 때

자기를 잊어버리는 경우가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대부분은 일시적인 것이어서 오래는 계속되지 않을 것입니다.

하지만 이 범천의 경지는 그렇지가 않습니다.

그들이 범천인 것은 그들은 자기가 하는 일 그 자체가 자기라고 느끼고 있기 때문입니다.

, 「내가 하는 일」이 나이며 그 밖의 나라는 존재는 없다는 것입니다.

「그 밖의 나」란 사적(私的), 완전히 인간적인 영역을 말합니다.

범천들은 이미 이 사적인 부분이 없어진 상태입니다.

그것은 24시간이 일이 되어 있는 사람들의 모습입니다.

24시간이 일이란 어떤 뜻인가?

그것은 자기의 모든 생명을 성스러운 목적을 위해 쓰고 있다는 뜻입니다.

돌이켜 보아 여러분 한 사람 한 사람이 자신의 하루 24시간

혹은 과거 수십 년을 회고할 때 어떻습니까?

지금 배우기 시작한 이 불법진리(佛法眞理)의 기준에 비추어 본다면

그 하루의 시간 혹은 수십 년의 시간의 대체 몇 퍼센트를

불법진리를 위해 혹은 불법진리에 맞는 생활을 위해 썼습니까?

「인생의 태반이 그러했다」라고 잘라 말할 수 있는 사람이 얼마나 있을까요?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그 퍼센티지(비율)는 적어질 것입니다.

그 퍼센티지가 적다는 것 자체가 여러분의 혼의 경지가 현재 어디쯤 있는지를 보여줍니다.

 

범천의 경지에 이르기 위해서는 자기의 목숨을 전부 불법진리를 위해 쓰고,

수백 년, 수천 년의 혼() 생활을 보내도 후회가 없다는 심경이 아니면 안됩니다.

단순히 좋아한다는 것이 아니라,

그 일이 혼을 뒤흔들 정도의 기쁨을 수반하는 것이지 않으면 안됩니다.

조그만 예를 든다면 여러분이 불법진리 서적을 읽는 자세 그 자체에도 차이가 있습니다.

어떻게든 배우지 않으면 안된다, 공부하지 않으면 안된다는 생각, 이 「않으면 안된다」에

 바탕을 두고 배우는 사람. 혼의 양식으로서 아무래도 필요하다고 해서 배우는 사람.

진리를 안다는 것이 얼마나 기쁨을 가져오는가를 알고서 배우는 사람.

배움은 곧 행위로 이어진다고 생각하고 읽는 사람.

서적 속에는 자기가 하지 않으면 안되는 내용이 쓰여 있다고 생각하여,

그것을 흡수하고 실천하는 일이 혼의 기쁨이라고 해서 읽는 사람. 이와 같이 차이는

여러 가지일 것입니다. 이 자세 속에 여러분들의 혼의 편린(片鱗)이 나타나 있습니다.

 

그 물고기가 무슨 물고기인지는 비늘 한 개를 뽑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그 온몸을 다 볼 필요는 없습니다. 수염을 보지 않아도 잉어의 비늘은 잉어의 비늘입니다.

붕어의 비늘은 붕어의 비늘, 도미의 비늘은 도미의 비늘입니다.

 

여러분이 어떤 존재인지는 진리를 향해 대응하는 방법을 보면 그 순간에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자신의 혼의 본바탕이 어떤 것인지는 여기에 서술해 온 것을 참고로 자문자답하면

결론이 나올 터입니다.

아직도 아득히 수행의 과정이 있다고 생각되는 사람은 오늘부터 마음을 바꿀 일입니다.

그리고 자신의 비늘 하나가 위대한 빛을 발하고 있다고 느끼는 사람은

그러면 이제부터 무엇을 하겠는가?
  잉어는 잉어로서의, 도미는 도미로서의 헤엄치는 방식이 있으리라.

그 헤엄치는 방식을 깨우쳐라. 자기가 하지 않으면 안될 일을 알라.
  그것이 중요한 것입니다
.
  출발점으로서 자신의 혼의 편린이 무엇을 이야기하고 있는지를 알고, 그리고 오늘부터

모든 의미에서, 모든 입장에서 한 걸음 전진, 두 걸음 전진해 가는 것이 중요합니다.

 

 

4. 일즉다(一卽多)의 인식

 

보살의 윗단계에 범천이라는 경지가 있고,

범천은 자기의 모습이나 형태에 얽매이지 않고 일 그 자체를 자기라고 파악한다고 했습니다.

이 의미에서 범천의 단계부터는 이미 인간으로서의 테두리는 초월해 있다고 해도 좋겠지요.

그리하여 「일 그 자체가 자기다」라는 관점에 설 때 커다란 변화가 나타납니다.

그것은 인식으로서는 상당히 어려운 일입니다만….

지상적(地上的)인 인식으로는 한 사람의 일이란

가령 1 1로 만나서 이야기를 한다고 하는 한계가 있는 활동입니다.

이것이 지상적인 일입니다.

1 1로 이야기를 하는 것 이외에는 생각이 나지 않는 것이 지상인의 일의 실제입니다.

 

물론 복수(複數)의 사람과 이야기를 할 수도 있지만,

지상적인 인식이라는 의미로 설명을 하면 지상의 인간은

「사람은 동시에 한 사람하고 밖에 이야기할 수 없다」라는 식으로 자기한정을 하고 있습니다.

왜냐 하면 입은 하나밖에 없고, 눈은 앞으로 밖에 향해 있지 않고, 귀도 두 개 밖에 없으니까

눈 앞의 사람하고만 이야기할 수 있게 되어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고차원 세계인 7차원 보살계의 상단계(上段階)에 오면 그렇지 않게 됩니다.

예를 들면 내가 5만 명에게 강연하는 일은

3차원적으로 본 경우에는 내 모습이 5만 명 있는 것과 똑같이 보일 것입니다.

지상인의 견해라면 5만 명의 내가 존재하여 일을 하는 것과 똑같아진다는 인식입니다.

상대방의 사람들은 모두 1 1로 나와 이야기를 하고 있는 셈이다.

그런데 동시에 내가 이야기를 하는 사람은 5만 명이 있다.

이것은 지상 세계이기 때문에 5만 명이 있고, 5만 명이 나를 보고,

내가 5만 명의 사람을 본다는, 그런 집단으로 이야기를 하는 모습이 되어 있지만,

실재계에서는 그렇지 않습니다.

각각 한 사람이 1 1로 나와 이야기를 하는 줄로 알면서 동시에

이만큼이나 많은 사람들과 이야기를 하는 일이 가능합니다.

그것은 인식의 출발점이 이미 이 육체에 없기 때문에, 이런 모습이라는 물리적 한계가

없기 때문에, 5만 명과 이야기를 하는 일 그 자체가 나의 진정한 모습이라는 뜻입니다.

 

여러분은 이 인식의 전환에 대해 이해하겠습니까? 여기서 이해할 수 없게 되면

다차원 우주까지 갈 수가 없습니다.

여기에서 퇴전(退轉)한 사람은 다시 한 번 아라한부터 배워 주십시오.

우주론(宇宙論)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이런 인식의 전환이 필요합니다.

인간은 아무래도 자기를 기준으로 해서 밖에 생각하지 못합니다.

여러분은 자기라는 존재를 다른 관점에서 볼 수가 있겠습니까?

가령 자기가 많은 사람들을 수용할 수 있는 대강당이라고 생각할 수 있겠습니까?

자기가 강당이라고 하고서 수만 명의 사람들을 받아들여서 강연회를 개최하고 있다

--- 이와 같은「관()의 전회(轉回)」를 할 수 있겠습니까?

이것을 할 수 있으면 여러분은 인간적 시야에서 떠나는 일이 가능해집니다.

, 지상적인 속성에서 떠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또 범천의 경지에서는 영적(靈的) 능력이 상당히 다르다는 이야기도 한 적이 있습니다.

이 범천 부근부터 「관자재력(觀自在力)」이 매우 강해진다는 이야기를 했습니다.

관자재력이 정말로 힘을 얻게 되는 것은 이 범천의 경지에서부터입니다.

 

 

5. 우주즉아(宇宙卽我)

 

 

그리하여 관자재력이 다다르는 곳은 대우주를 아는 일이라고도 말씀드렸습니다.

, 대우주를 알기 위해서는 인

식의 전환을 할 수가 있다는 것이 전제로서 아무래도 필요합니다.

자기를 강당으로 삼아서 강연회를 본다는 이야기를 했습니다만,

이것을 더욱 확대해 보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 여러분은 우주가 될 수 있다는 뜻입니다.

이것을 더욱 더 확대하면 대우주가 될 수 있습니다. 대우주 그 자체가 되어서

대우주의 안에 있는 세계를 볼[] 수가 있는 가능성을 시사하는 것입니다.

과거에 「우주즉아(宇宙卽我)」라는 체험을 한 사람이 몇 사람인가 있습니다.

그 점에 대해서도 이미 몇 번인가 언급하였습니다.

그리고 이 우주즉아의 경지에도 3단계가 있다고 말했습니다.

1단계의 우주즉아는 좁은 의미의 태양계(太陽界),

즉 여래계(如來界)의 상단계(上段階)에서 얻어지는 우주즉아입니다.

그것은 소크라테스와 같은 여래가 일찍이 경험했던 일입니다.

소크라테스가 이 우주즉아를 경험했다는 것은

후에 제자인 플라톤이 쓴 『파이돈(Phaidon)』이라는 책 속에 분명히 쓰여져 있습니다.

그에게는 아득한 상공에서 지구의 모습을 내려다 본 체험이 분명히 있었던 것입니다.

그 일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그의 우주즉아란 육체를 이 지상에 놓아두고서

()이 이 육체를 떠나 한없이 상승하고 확대되어 지구를 눈 아래로 내려다보아

지구가 조그만 공처럼 보인다는 의미에서의 우주즉아였습니다.

8차원 여래계라 일컬어지는 세계에서의 우주즉아는 지구라는 관점,

지구를 상정하지 않으면 아무래도 불가능하다는 한계가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위의 제2단계의 우주즉아로서 「은하즉아(銀河卽我)」라는 경지가 있었습니다.

이 은하즉아라는 경지는 자기의 의식이

은하계의 크기로까지 확대되어 지구가 조그마한 세포로 보이는 경지입니다.

 

더 나아가 이 위에 있는 제3단계의 우주즉아는 어떤 경지인가 하면,

대우주가 하나의 생물처럼 보이는 경지입니다.

이것은 여러분이 극히 작은 마이크로(micro, 미시적) 인간이 되어서 자기의 인체(人體)

들어가 있는 모습을 생각해 보면 상상하는 것도 그리 어렵지 않을 것입니다.

바이러스와 같은 모습이 되어 자기의 육체 속에 들어가 자기를 관철한다면

어떻게 보이겠습니까?

그것은 거대한 우주 공간이면서 각각의 기능을 가진 부분들이 모여 있는 모습입니다.

 

이 제3단계의 우주즉아의 경지에 도달하면, 가령 여러분이 「은하」라고 부르는 부분

[사실은 은하라고 일컬어지는 것은 아주 많이 존재합니다만],

지구에서 본 은하라고 일컬어지는 부분 등은 하나의 심장처럼 보입니다.

분명히 심장처럼 보입니다. 그리고 「태양계(太陽系)」라는 태양을 중심으로 하는

혹성군(惑星群) 등은 하나의 동맥처럼 보이게 됩니다.

우주의 중심부에서 부처의 에너지, 빛이 보내져 와, 은하라는 심장을 통하여

다시 태양계 쪽으로 힘차게 보내져서 태양을 중심으로 하여

지구나 금성이나 그 밖의 혹성으로 이어지는 대동맥으로 흘러가는 모습이 보입니다.

여러분이 천체망원경 등으로 보는 우주는 조그마한 별의 모여 있는 모습이고

나머지는 진공처럼 보일 것입니다. 하지만 영적(靈的)인 눈으로 볼 때는

이것이 하나의 생물로 보입니다. 커다란 목적을 가지고 움직이는 몸처럼 보이게 됩니다.

 

예를 들면, 그 몸의 오른손 부분이 올라가면

그 별무리[星群]에서 커다란 변동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그리고 새로운 별이 생겨나거나 새로운 태양계(太陽系)가 생겨납니다.

또 병으로 인해서 육체의 여러 부분들이 사용할 수 없게 되는 일이 있습니다만,

그런 때란 하나의 별의 죽음 혹은 그 별을 중심으로 하는 혹성군들이 죽어 가는 모습이,

사라져 가는 모습에 해당합니다.

또 블랙홀은 일종의 암세포로 보입니다. 그것은 영적인 눈으로 보아도

마치 암세포와 마찬가지로 검게 그을려 어두컴컴한 형태로 보입니다.

그것은 실로 암세포이어서 거기에 다가간 것들의 목숨을 빼앗아 갑니다.

다가가는 것이란 무엇이겠습니까? 그것은 그 블랙홀에 가까운 별들

[이것은 은하 속에서 말하자면 세포입니다]이며, 암세포에 가까운 곳의 세포는

잇달아서 침식되어 빨려 들어갑니다. 이런 암세포와 같은 블랙홀이 있습니다.

 

, 이런 은하계 우주라고 하는 광대한 세계 속에서 매우 기능적인 몸을 만들고 있는

셈입니다만, 인간의 육체도 여러 부분에 고장이 생기거나 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여러 은하를 발판으로 하여 활동하는 동안에,

그와 같이 위대한 부처로부터 갈라져 나온 몸일지라도 병드는 부분이 나타납니다.

이 병드는 부분이 무엇인가 하면 상극(相剋)을 이루는 부분입니다.

각각의 혹성 집단 속에는 한가지 목표가 있습니다.

커다란 별의 무리들 속에는 한 가지 진화의 목표가 있습니다.

지구를 중심으로 하는 태양계에는 태양계로서의 목표가 있고, 이상이 있고,

그것은 다른 태양계와는 다른 내용입니다.

이 지구를 중심으로 하는 태양계의 목표는 무엇인가 하면,

현시점에서 가장 중심인 목표는 두 가지가 있습니다.

 

첫째는 한없이 지()를 높여가는 일입니다.

지적(知的)인 진화를 하나의 커다란 목표로 내걸고 있습니다.

또 하나는 지적인 진화와 동시에 대조화(大調和), 조화를 실현하는 일입니다.

이것은 미()로 이어져 가는 것입니다.

이 「지()」와「미()」라는 두 가지를 목표로 내걸고 있습니다.

그러나 다른 은하, 다른 태양계에서는

전혀 다른 목표에 바탕을 두고 활동하는 존재들이 있습니다. 이런 집단군(集團群)

서로 겹치는 곳에서 하나의 알력이 생기고 그것이 블랙홀화()하는 수가 흔히 있습니다.

이것이 제3단계의 우주즉아에서의 인식입니다.

이와 같은 우주즉아의 한 단계 더위의 경지로서 「불즉아(佛卽我)

라고 일컬어지는 경지가 있습니다. 이 불즉아의 경지가 되면 좀 더 인식이 앞서게 됩니다.

 

3단계의 우주즉아에서는 이 대우주가 부처의 몸으로서,

심장이나 내장이나 혹은 여러 가지 혈관처럼 보였던 것이 한층 시야를 높여 가면

이미 여러분이 보고 있는 이 대우주 자체가 하나의 구체(球體)처럼 보이게 됩니다.

그것은 구체입니다. 조그마한 공처럼 보입니다.

그리고 이런 구체가 한층 더 큰 대우주 속에 몇 개인가 떠 있는 것이 보입니다.

이 구체를 만들고 있는 것은 13차원 우주라 일컬어지는 세계입니다.

 

13차원 우주를 한 차원 높은 14차원 이후의 세계에서 보면 정말로 공입니다.

공처럼 되어서 떠 있습니다.

그리고 여러분은 상상할 수 있을 것입니다만, 이 공이 또 각각 잘 통합되어서

그 다음 질서를 형성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각각으로 떠 있는 공이 하나로 통합되어서 앞서의 은하계와 마찬가지로

보다 큰 우주에서의 심장을 만들거나 신장이나 위장을 만들거나 두뇌를 만들고 있습니다.

그러면 한층 더 높은 차원인 14차원 이후의 대우주에서 볼 때, 지금 여러분이 살고 있는

지구가 속한 13차원의 우주의 공[구체]은 대체 어느 부분에 해당하겠습니까?

여러분이 지금 살고 있는 곳은 한 단계 더 커다란 우주에서 볼 때,

 육체로 말하면 마치 「눈」의 부분에 해당됩니다. 오른쪽 눈에 해당되는 부분에 위치합니다.

, 여러분이 살고 있는 세계는 14차원 이후의 우주에서 본다면 눈에 해당됩니다.

이 눈을 만들고 있는 세포 하나 하나가 조그마한 여러분의 눈으로 보면

광대한 별무리[星群]입니다만, 그와 같은 우주입니다. 그런 세계입니다.

왜 여러분의 세계가 눈에 해당되는 것이겠습니까?

즉 여러분이 살고 있는 이 대우주는

부처가 창조한 세계를 보기 위한 「창()」의 역할을 맡고 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이 살고 있는 이 우주를 통해서 다른 모든 세계가 아주 알기 쉽게 되어 있습니다.

즉 여러분이 살고 있는 우주 공간이란 부처가 창조한 세계 속에서는 하나의 대표 작품입니다.   부처가 이상(理想)으로 삼는 갖가지 요소를 여기에 다 모아 놓은 것입니다.

그것이 모형 정원처럼 되어,

그 속에서 여러 가지 유형, 모델이 되는 사건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그런 세계라는 뜻입니다.

 

 

6. 태양계 영단의 사명

 

여기까지 말씀드리면 지구계 영단(地球系 靈團),

태양계 영단(太陽系 靈團)의 사명을 대강은 알게 되리라고 생각합니다.

여러분은 매우 긍지 높은 혼()의 그룹입니다.

 

여러분이 살고 있는 우주는 한층 더 큰 우주에서 보더라도 대단히 기대되고 있는 그룹입니다. 이 속의 은하의, 이 속의 태양계에 살고 있는 여러분은

부처로부터 몹시 기대 받고 있는 그룹입니다. 혼의 집단입니다.

그것은 보다 매크로(macro, 거시적)의 견지에서 보더라도 확실하게 말할 수 있는 일입니다.

 

이 일은 결코 지구에 살고 있다고 해서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보다 더 커다란 우주적 관점에서 보더라도

지금 우리의 혼 그룹들은 상당히 전진한 커다란 이상을 가진 그룹이라는 말입니다.

그런 여러분이 지금 20세기[본 강연 당시]에 대거로 육체를 가지고 살고 있습니다.

이 의미를 알아주십시오. 우리의 이번 일은 얼마만큼이나 커다란 사명을 띤 것인가,

20세기에 육체를 가지고 지금 대호령(大號令) 아래에, 이 커다란 운동 아래에

여러분이 모여들었다는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라는 것, 그것을 알아주십시오.

그것은 대우주의 거대한 세계에서 보면 이미 몇 조() 분의,

아니 그 몇 조 분의 몇 조 분의 몇 조 분의 1정도의 확률이지만,

그러나 그것은 확실히 선택된 혼들임은 사실입니다.

우연이 아니라 필연적으로 선택 받은 혼이라는 뜻입니다.

이 사실을 알았을 때 가만히 앉아 있어도 되는가?

잠자고 있어도 되는가? 깨우치지 않아도 되는가? 행동하지 않아도 되는가?

지금 일어서지 않아도 되는가? 여러분은 그것으로 인생을 완수할 수 있다고 생각하고 있는가?

단순한 육체 인간이 아닌, 그 정도로 위대한 사명을 가지고 태어난 여러분이라면

대체 얼마만큼의 활약이 기대되고 있다고 생각합니까?

 

지금 이후로 단순한 인간임을 그만두십시오. 여러분은 그런 다차원 우주 속에서

매우 드문 확률 아래에 기대 받고 있는 혼으로서 대체 얼마만큼의 활약을 해야 하겠는가?

다른 혹성에 있는 사람들에 비해서도 극히 유리한, 혜택 받은 환경에 있습니다.

이 환경에 있으면서 나태한 삶을 사는 것은 용서되지 않습니다.

후퇴는 용서되지 않습니다.

부디 명심해서 이 커다란 사명을 깨닫고 이제부터 함께 정진해 갑시다

.

 

 

텐구

2016.08.20
06:09:07
(*.99.101.103)

사이비종교자료네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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