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것은 결코 아니다. 오히려 그의 꿈 이야기 속에는 잠을 깬 인간만이 가질 수 있는
냉철한 통찰이 담겨져 있어 인간의 지와 사물과의 관계를 추론하고 있다.
'지적인 인식은 대상을 얻은 다음에 비로소 확정되는 것이나, 대상이 되는 사물 자
체는 끊임없는 변화 속에 있다.'(대종사)
장자는 현상계의 본질을 변화 가운데서 추구한다. 만물은 한순간도 그칠 사이 없이
생성과 소멸을 반복하면서 변화한다. 장자는 모든 변화의 근원인 동시에 일체의 변화
를 지배하는 근본 원리를 상정하여 '도'라고 이름 붙였다.
'도는.... 무라고 밖에 표현할 수 없는 것으로, 마음으로 느껴 얻을 수는 있어도 감
각으로 확인할 수는 없다. 다른 어떤 것에도 의존하지 않는 독립적인 것으로, 천지 개
벽에 앞서 존재했다. 귀신도 상제도 하늘도 땅도 그 연원은 모두 도이다.'(대종사)
도는 사물을 떠나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각각의 사물에 내재하는 것이다. 이 도를
가지고 사물을 보면 일체의 사물에 구별이 없어진다. 도는 원래 무한정한 것이므로 사
물의 구별도 일시적인 것에 지나지 않는다. 이것이 자연의 진정한 모습이다.
그러나 인간의 지는 무한정한 자연을 한정지으려 한다. 사물을 대비하고 분별하여
질서를 세우려 하는 것이 지이기 때문이다. 그러면 인간은 어떻게 사물을 분별해야 할
까?
'모든 존재는 저것과 이것으로 구분되나, 저것 쪽에서 말한다면 이것은 저것이고 저
것은 이것이 된다. 즉 저것이라는 개념은 이것이라는 개념과의 대비에서 비로소 성립
되며, 이것이란 개념은 저것이란 개념과의 대비에서 비로소 성립된다.....'(제물론)
인간의 판단은 항상 상대적인 것이며, 절대적인 것은 있을 수 없다. 그런데도 인간
은 지에 의지해 자기의 판단만이 옳다고 서로 맞서 싸운다. 이것이 지적 동물인 인간
의 비극의 뿌리이다. 그러나 인간이 지를 버리지 않는 한 이 비극의 뿌리는 없어지지
않는다. 인간은 지의 한계를 자각하고 지를 넘어서야 한다. 그러려면 사물의 차별상에
사로잡히지 말고, 모든 것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길밖에 없다.
'진인은.... 만사를 있는 그대로 내맡길 뿐, 작위하려 하지 않는다.... 이 세상에
태어났다고 해서 기뻐할 것도 없고, 이 세상에서 사라진다고 해서 슬퍼할 것도 없다.
자기 자신도 하나의 자연 현상으로 보고, 죽음으로 인해 마음을 괴롭히지 않는다. 지
에 의해 도를 해치지 않고, 인위로써 자연을 해치지 않는 생활 방식이란 바로 이것이
다.'(대종사)
자연 그대로의 인간인 진인은 장자가 그린 인간의 궁극적인 이상상이다. 사물을 차
별하지 않고, 어떤 것에도 집착하지 않으며, 생성 변화하는 외계의 사상에 무한으로
순응해가는 자유로운 정신이 바로 진지인 것이다. 지에 구속되어 자연에서 점점 멀어
져가고 있는 인간이 진인의 자재로운 경지에 도달하려면 자기 자신의 자연을 되찾지
않으면 안 된다. '도와 일체화한다.'는 말은 완전한 무아의 상태로 돌아가, 일체를 있
는 그대로 받아들여서 무한한 자유를 누리는 상태를 말하는 것이다.
장자에게 자유란 인간이 자기의 속박에서부터 완전히 벗어나는 것을 뜻한다. 도를
체득함으로써 현상계의 차별과 대립의 상에 사로잡히지 않는 인간, 즉 '주어진 현실
속에 살면서도 그 현실에 구애받지 않는 자재로운 정신의 소유자'만이 참으로 자유로
운 인간이라고 생각하였던 것이다.
쓸모없는 것일수록 인위와의 관계는 멀어져서 자연이 그대로 보존된다. 인간이 그
어떤 것의 도구도 되지 않고, 자기 자신을 위해 살 수 있어야만 천수를 제대로 누릴
수 있는 것이다.
'....육체가 쓸모없다는 것 하나만으로 편안한 생애를 보낼 수 있다. 하물며 재덕이
쓸모없는 인간이 천수를 제대로 누리지 못할 까닭이 어디 있겠는가?'(인간세)
[제1분(分)] ①
1. 대본경(大本經)1)
이와 같이 나는 들었다.
어느 때 부처님께서는 사위국(舍衛國)의 기수(祇樹) 화림굴(花林窟)에서 큰 비구(比丘) 대중 1,250명과 함께 계셨다.
“여러 비구들아, 너희들은 여기 모여 무슨 논의들을 하고 있었는가?”
비구들은 있었던 일들을 낱낱이 말씀드렸다.
세존께서는 비구들에게 말씀하셨다.
“훌륭하고 훌륭하다. 너희들은 평등한 믿음을 가지고 집을 떠나 수도(修道)하고 있다. 대개 행해야 할 일에 두 가지가 있으니, 첫째는 모든 성현(聖賢)들이 법을 강(講)하신 일이요, 둘째는 그 분들이 침묵하신 일이다. 너희들이 논의하는 것도 바로 그러한 것이어야 한다. 여래의 신통과 위력은 넓고 커서 전생의 무수한 겁(劫) 동안의 일들을 아느니라. 그것은 법성을 잘 이해하기 때문에 아는 것이기도 하고, 또 모든 천인들이 와서 말해주기 때문에 아는 것이기도 하다.” (경전 인용 끝)
위 중아함경에서 처음 설법의 주제가 여래의 신통과 위력이라는 권능의 근본에 대한 논의 부터 이루어지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즉 그에 대한 석존의 답은 "모든 천인들이 와서 말해(성문) 주기 때문이다" 입니다.
독각승(獨覺乘): [명사] [불교] 삼승(三乘)의 하나. 홀로 수행하여 깨달음의 경지에 이르는 교법을 이른다.
벽지불(辟支佛): [명사] [불교] 같은 말 : 연각2(緣覺)(부처의 가르침에 기대지 않고 스스로 도를 깨달은 성자(聖者)).
--- 사전인용 끝 ---
위와 같이 연각승은 모든 것이 연결되어 있다는 연(緣)법을 깨닫는(覺) 단계이며 말이나 글로 자세하게 설명을 해 주지 않지만 세속에서 알기 어려운 배움을 자신만의 깨달음이라는 독각의 방편을 위주로 하며 보살의 밑에 성자(聖者)의 지위에 들어갈 수 있는 최소한의 방편에 해당됩니다. 성문승의 채널러는 메시지를 전달받아 다시 전달하는 메시야가 될 수 있을지언정 아직 성자의 반열에 오르기 어렵지만 연각승의 경지에서 부터는 그것이 가능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연각승의 초입에 들었다고 해서 모두가 성자로 인정 받는 것은 아닙니다. 망상만을 깨닫다가 한평생이 끝나거나 아에 마왕의 권속이 된 줄도 모르고 사이비 교주로 지내다가 그것이 진리인양 살다가 저 세상으로 가게 되어서야 모든 것에 속았음을 알게 될 수도 있습니다.
현생에 나오기 이전에는 마왕 보다 더 높은 지위에 있었다가, 그러한 자신의 위신력과 지혜를 뽐내면서 마왕 정도는 언제든 이겨낼 수 있다는 아상에만 빠져 인세에 들어 올 때의 규칙인 모든 기억을 지운 상태로 지구를 선택하여 인간으로 태어 났지만, 그동안 마왕이 공성(空性)을 획득하여 권능이 높아지고 그로 인한 속임수에 마왕과 인연을 짓게 된다면 그 해당 원력만큼 마왕에게 빼앗기게 될 것입니다.
이러한 경우에는 "신과 나눈 이야기" 책 내용에서 말하는 신성한 이분법이 아닌, 영혼의 강제적인 이분법이 시행될 수 있는데 이것은 모두 자신의 욕심에 의한 결과에 해당 됩니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다시 때가 되면 그러한 분리가 강제된 것이기 때문에 원래의 영혼이 다시 합쳐지려는 작용 또한 강하여 영원한 분리는 아닙니다. 다만 그만큼 저질렀던 욕심에 대한 고생을 하게 되리라 판단합니다.
장자에 관한 내용에서 "(道는) 천지 개벽에 앞서 존재했다. 귀신도 상제도 하늘도 땅도 그 연원은 모두 도이다" 라는 내용에서 보듯이 또 역사적 자료들을 통하여 옥황상제에 대하여서는 아시아 지역에 오래 전 부터 잘 알려져 왔었는데, 불교 경전에서 서술된 내용에 따라 교학으로 연원을 따라가면 원래 요순 시대 이전 부터 있었던 옥황상제가 인도로 들어가 "인드라" 라는 神으로 불리게 되었고 그 인드라가 다시 불교 경전 번역시 한자로 변환되어 환인, 즉 제석천의 제석환인으로 원래 인간세계에서 좋은 일을 많이 하여 인간세의 하늘을 관장하는 신이 되어 있었음을 석존의 설법 내용에 따라 알 수 있습니다.
그러한 인도에 다시 석존이 현세에 출현하면서 제석환인의 권유를 받아 보리수 밑에 앉게 되고 깨달음을 얻어 "붓다"라는 이름이 처음 나오게 되었습니다. 붓다라는 이름이 생겼다고 해서 神이 아닌 것이 아닙니다. 붓다 또한 또 다른 신의 다른 이름에 지나지 않습니다. 다만, 그러한 기존의 신들과는 다른 격(格)을 갖고자 붓다 라는 이름을 사용하는 것으로 석존의 전생에 수 많은 깨달음과 부처의 수기를 준 모든 인연 있는 신(神)들을 모두 부처님이라는 지위로 함께 높여서 기존의 신들과는 다르게 부르도록 작용한 것입니다.
다시 정리해서 말해 보면, 모든 천계에 즉 삼천대천 세계에 원래 도라고 부르든 도라고 부르지 않든 이름할 수 없는 존재들이 수 없이 많았는데, 그들을 모두 묶어서 신이라고 규정 짓고 인간세에서 불리다가 석존을 내세운, 각각의 갈래 길에 있지만 모두가 연결되어 있는 높은 신들이 석존에 의하여 과거세 부처님들로 추앙하여 받들어 지고 자신은 그 당시 현세를 주관하는 새로운 대표적 신이 된 것이라 하겠습니다. 이러한 점은 불경의 여러 경전에서 "이 법은 과거나 현재나 세상의 모든 부처님들이 인정하고 모두가 지키기로 약속된 법" 임을 곳곳에서 설명하고 있는 것으로도 이해가 될 수 있을 것입니다. 석존의 현세 출현이 없었다면, 그들은 여전히 그냥 신으로만 불리고 있었을 것입니다. 지금은 석존 또한 과거 7불에 속해 있습니다.
(과거칠불(過去七佛): [명사] [불교] 지난 세상에 나타난 일곱 부처. 비바시불, 시기불, 비사부불, 구류손불, 구나함모니불, 카시아파불, 석가모니불이다. - 국어사전)
그런데 그렇게 높은 신들은 대대로 일맥으로만 내려 오다가 (법화경) 자신들이 직접 나서지 않고 석존의 바로 위의 스승인 연등불 때 부터, 불법(佛法)이라고 하는 새로운 방식을 석존이라는 제자에게 전수하여 법통이라 이르게 하고, 당시 인도에서 힌두교라는 온갖 귀신들이 장악하여 있던 세상에 나오게 하여 근기가 낮거나 탐진치와 욕심으로 인하여 죄를 짓는 중생들과 어린 영혼들을 위하여 특별한 교육을 위한 방편으로 나오게 한 것이며 석존 이후로는 다시 또 석존을 대신하여 계속적으로 현세에서 가르치는 높은 스님들이 법통을 따라 불가(佛家)를 이루어 내려 오고 있습니다.
석존 열반 이후의 시기에, 노자와 장자가 다시 또 나와서 그동안 道에 대한 개념 자체도 별로 없었던 세상에, 각각 도덕경과 장자라는 내용으로 알려지게 되었습니다. 그 시기 이후로 도 또한 많이 알려지게 되었습니다.
불교와 도교의 방편을 비교하여 보면,
가. 불교는 석존 당시에 인정하고 승인한 속가제자로의 입문이 있어 쉽게 들어갈 수 있지만 깊이 들어 갈 수록 계율 때문에 힘들어지고 도교는 입문 때 부터 어렵지만 여러가지 구속을 당한 이후로 이겨내면 이겨낼 수록 구속이 풀어지는 경향이 대부분입니다.
이 부분에서 하나의 영혼 개체에 대한 자유의지의 제약이라는 문제가 발생하는데, 불교는 다양한 방편 때문에 자유방임이라는 형식을 취하면서 스스로 계율을 자발적으로 지킬 것을 약속하고 들어가 무아(無我)사상으로 자신의 거짓 에고(ego)의 소멸과 업장이라는 장애를 닦아 더욱 부처님에게 의지하게 되고 계율에 대한 구속을 강하게 느끼면서 공사상까지 도달하면 반야심경의 공포를 경험하다가 완전히 그 공포를 이겨내는 생사관을 넘기게 되면 공사상을 벗어나고 열반이라는 자등명의 경지에서 자성(自性 청정한 자신의 영혼 품성, 본래면목)이라는 대자유를 찾게 됩니다.
도교는 그와 반대의 절차로 처음 부터 무속인이 되게 하거나 산속에 칩거하는 형태를 취하여서 자유의지를 심하게 구속 받다가 道를 어느 정도 알았다고 하는 독각(연각)의 경지에 들어가면 시험을 겪는 과정에서 수 많은 실수와 구속이 절정을 이루다가, (연각을 깨닫게 하는 방편이자 시스템인) 제법실상의 현상에 대한 깨달음이 넓어지고 깊어질 수록 진리추구(상구보리)라고 하는 자신의 자유의지를 더욱 강화 시켜 가면서 마장이라는 구속을 자신이 직접 쳐 부수어 마침내 마왕에게도 굴복 당하지 않는 자유의지가 확립이 되면 드디어 진인이라는 대자유를 찾게 됩니다.
나. 불교는 방편도 많고 설법이나 각종 이론들이 많이 나오는 것에 비하여 도교는 경전 내용이 극히 짧을 뿐만 아니라 그 내용을 일반인이 보기에는 무슨 내용인지 도저히 알 수가 없게 되어 있거나 그러한 이론서들이 나온다 하여도 모두가 다른 해석들을 하기 때문에 어느 것을 따라야 할지에 대해서 조차 가늠하기 어려우며, 어렵게 도를 어느 정도 익혔다 하여도 "천기누설" 이라는 제약이 있어서 그것을 세상에 알리는 일 조차 어렵게 제약을 걸고 있습니다. 이것은 진인이라는 경지에 올라서도 노자가 세상에 남기거나 행한 것이라고는 5,001 글자의 도덕경이 거의 전부라 해도 좋을 정도인 데다가 그렇게 얼마 되지도 않는 분량의 도덕경 조차 일반인은 도저히 그 본의를 알 수 없게 중중무진의 중첩적인 뜻으로 단어들을 조합해 놓은 것만 보아도 천기누설 이라는 제약이자 특성이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다. 한국 불교는 도교와 밀접하게 융합하여 이러한 특성 때문에 많은 설법을 하지 않고 간단한 화두만을 사용하여 스스로 깨닫게 하는 방편인 "간화선"을 많이 하고 있지만, 한국 이외의 다른 나라들의 불교에서는 대중을 모아 놓고 설법을 하는 단계에 있는데 사실 대중이 많으면 (하화중생) 많을 수록 업장이 두터워져서, 더 높은 상위의 진리추구(상구보리)에 장애가 많이 나타나고 높은 道로 나아가기가 어렵습니다. 하화중생과 상구보리 라는 두 방편 모두 없어져서는 안되는 일로 어떤 것에 더욱 중점을 둘 것인지에 대해서는 각자의 선택에 달려 있습니다.
라. 불교에서는 점을 쳐서 나오는 점사(占辭)를 못하도록 경전과 계율로 정해져 있는 것에 반하여, 도교의 낮은 근기에서는 대부분 점을 치는 것으로 시작을 합니다. 옛 제사장인 무속인들과 요순 시대의 거북이 등껍질이나 짐승의 뼈에 줄(線)을 긋고 불로 가열하여 그 줄이 갈라져 나가는 형태에 따라 길흉화복을 판단하는 일, 산통을 깬다 할 때의 산통((算筒), 육효나 팔괘, 새(鳥)나 동물이 골라 잡은 점괘, 타로 카드, 화투점, 심지어 손바닥에 침을 뱉어 놓고 쳐서 튀는 방향으로 길을 잡아 나가는 방식, 사주팔자학, 명리학, 천문학(서양 별점), 양택음택을 보는 지리학 등등이 모두 발전하여 오늘날의 과학(科學)이라는 이름으로 부르고 있는데, 이것은 도교에서 시행 해 왔던 과거의 예언이라는 방식에서 확률 계산에 따라 틀릴 수도 있음을 미리 부터 가정하는 예측으로 인정되는 것이 현재의 통례가 되었을 뿐입니다.
만약에 아직까지도, 사물의 이치만을 따지는 경우가 아닌 인간의 길흉화복에 관계된 것을 두고 그 대상자에게 확정적으로 단언을 하거나 예언과 같은 효력을 발휘하고자 애쓴다면 하근기에 해당되는 것이며 이것은 금전적 이익을 추구 하거나 상대를 겁박하여 권위를 세워서 자신의 욕심을 채우려 하는 경우에 많습니다. 욕심이 있었거나 없었거나, 도를 도라고 하면 이미 도가 아닌 것이며, 제행무상으로 모든 행하여지는 것은 일정함이 없다 라는 높은 수준의 원칙을 알지 못하거나 알고도 무시한 경우가 되겠습니다.
이것은 분명 하근기에 해당되는 일이지만 나(유전)는 가끔 대대법으로 상대의 낮은 수준에 따라 같이 낮아져서 상대하는 방편을 사용합니다. 나는 낮아진 상태를 쉽게 다시 올릴 수 있지만 일반인들이 이러한 경우를 따라하면 곤란한 일이 생길 수 있습니다. 이 대대법은 인과율에 대한 직접적인 시행으로 원래 부터 있는 도교의 방편이기도 합니다. (구약) 눈에는 눈, 이에는 이 입니다. 그러나 나의 대대법은 도교의 직접적 방편과 불교의 우회적 방편을 모두 사용하여 비선형적 방식으로 일반인은 물론 당사자 까지 잘 모르는 상태에서 뒤 늦게 알게 되는 경우도 많습니다. 세상 무서운 줄을 모르고 악한 일을 알면서도 행하는 자들에게 우선적으로 적용합니다.
마. 불교는 마음을 중시하는 것에 반하여 도교는 양신(養身) 수행이라는 몸 부터 시작하여 물질적 물체적 사물들에 대한 원리 이해의 추구가 더 강한 편입니다. 서양의학은 인도에 이미 있던 인드라(제석환인)의 道가 브라만 계급 중에서도 상위의 道로 이미 있었고 그곳 옆의 중동 지역 사막으로 가서는 저급의 제사장들로 옮겨가 구약이 되었기 때문에 서양의학은 인간의 몸 자체도 물질화 시켜서 수술을 필요 이상으로 많이 하고 있는 경향이 있습니다.
서양의 영어에서는 Conscience를 양심이라고 하는데, 나뉘어진 Science(과학. 科 과목 과) 과목을 합(Con)하면 백과사전이 될 수 있겠지만, 나뉘어진 마음이 단순히 모였다고 해서 양심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불교는 대자대비심이라는 전체의 마음을 증득하여야 하지만 설법으로는 방편이 수 없이 나뉘어져 있고 설법이 너무 많아 오히려 혼동을 일으키기 쉬우며, 도교는 道라고 하는 전체를 설명하기 좋아하면서 그에 따른 방편들은 모두 제각각으로 다른데다가 그나마 설명도 별로 없습니다. 어느 수준 이상으로 올라가면 불교는 공사상과 만나고 도교는 무위사상과 만나는데 그 두가지를 깨 부수고 불교는 대자대비심을 깨달아야 하며 도교는 하나의 생명이라도 더 살려야 한다는 생명존중과 함께 義를 깨달아야 더 높은 도로 올라가게 되며 최소한 물질자연을 벗어나야 합니다.
바. 불교는 거시세계를 지향하고 도교는 미시세계를 지향하는데, 불교의 삼천대천세계관을 설명한 여러 경전들을 보면 높은 지위로 올라가는 각각의 세계에 대한 표현에서 점점 그 규모나 형상이 커져감을 알 수 있습니다. 도교는 도덕경에서 그러한 거대함을 오히려 거추장스러운 것으로 설명하면서 묘(妙)라고 하는 작거(小)나 적은(少) 상태를 지향하는데 장자의 경우 "소요유" 편에서 붕정만리의 이야기 때문에 착각할 수 있겠지만 나비와 같은 작은 움직임으로 "나비 효과(버터플라이 이펙트)"와 같은 방편을 더욱 선호 한다고 하겠습니다.
불교는 본질을 넓게 펴 나가거나 쪼개서 수 많은 자비라는 방패로 포용하거나 "거울 효과(미러 이펙트)"의 환상으로 끝 없는 포위를 연출하는 방편을 위주로 합니다. 도교는 넓었거나 크거나 어떠한 본질이라도 화두와 같이 압축하고 압축하여 힘을 사용하지 않고 축적하여 있다가, 그 축적된 힘으로 튼튼한 실(絲)에 연결된 창과 같이 의(義)라고 하는 하나의 길(道)로 가급적 최대한 멀리 끝없이 보낸 후 그것을 다시 잇거나 엮어서 "천망회회 소이불실 - 하늘의 그물망은 구멍이 많은 듯 엉성 해 보여도 놓치는 경우가 없다" 와 같이 가급적 무위(하지 않음)을 우선으로 하지만, 바둑의 포석과 같이 수 많은 바둑돌을 사전에 깔아 놓은 상태로 상대가 돌을 어디에 내려 놓든 그것에 대한 모든 대응 방식이 준비 되어 있다는 방편을 사용합니다.
사. "기름(油) 부은 자"를 선호하던 땅에 태어난 예수님은 세례 요한의 물로 행하는 도교로 시작하여 (도덕경에서 물은 모든 만물과 생명의 기본 물질로 설명되어 있고, 세상에서 가장 선하다고 하는 상선약수 라는 대표적 사자성어가 있음) 예수님의 행적은 불교의 산상수훈을 비롯하여 그 밖의 여러 언행들이 석존의 독생자 라훌라(밀행제일존자 - 오른손이 하는 일을 왼손이 모르게 행함)와 비슷하고, 삼신불(법신,보신,화신)사상이 삼위일체 사상과 일치하며, 윤회 사상과 일불승(하나님)을 포함한 내용으로 가르친 것이 거의 불교 세계관과 비슷합니다. 예수님 십자가 사건 바로 전의 약속인 물과 성령이라는 보혜사 성령은 대표적인 보신불에 해당 됩니다.
위 일곱개 항목의 불교와 도교 그리고 최종적으로 기독교의 비교까지 설명 했지만 그러한 방편이 꼭 저러한 방식대로만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이것 저것 섞여서 다양한 형태로 나오고 있고, 현재 그러한 다양한 방편이 인터넷 이라는 빠른 수단을 동반하고 이것이 불교의 천리안이나 천이통에 해당되는 수단으로 다양한 교류와 함께 해당 영혼들에게 작용하는 원력들 또한 수시로 바뀔 수 있는 가능성들이 많아져서 때로는 영적 혼돈, 카오스의 고통이 증가되는 상태로 인식되어 질 수 있으며 그것을 이용하여 말법 말세 종말 등과 같은 용어들을 남용하는 거짓 예언들이 세상을 더욱 어렵게 만드는 요인으로 작용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잠시 세상이 혼탁하게 된 것에 지나지 않아서 시기가 지나면 다시 각각의 세계가 분명하게 진리로 드러나게 될 것입니다.
4. 제법실상 연기법을 포함 한 일불승(一佛乘)
연각을 통하여 어느 정도 깨달음을 증득하면 보살(하화중생 입장)이나 아라한(상구보리 입장)의 지위에 올라가게 되는데, 이 두가지에 대한 결정은 자신의 선택입니다. 어느 것이 더 좋다고 할 수 없습니다. 보살과 아라한 이전에 공사상을 통하여 공성(空性)을 증득하면 남녀라고 하는 성별 또한 중성적 성격을 보이는데, 여자가 아라한이라는 상구보리에만 집착하면 대자대비심을 깨닫기 어렵고 남자가 새로운 경지라는 개척을 두려워 하여 보살행만을 행하면 더 높은 깨달음을 얻기가 어렵습니다.
속세의 출가하지 않은 불교인들 중에서 여자는 남편과 아들에 대한 사랑과 자비심의 원력을 보태는 보살 수행을 열심히 하게 되면 그러한 사랑과 자비의 원력에 감응이 되어 대자대비심 수행을 따로이 닦지 않고 아라한의 상구보리에만 집중하는 중에도 그것이 서로 융합되어 남편이나 아들이 부처의 경지에 먼저 도착할 수 있고, 먼저 도착한 속가제자의 불교인은 인연 중에서 가장 큰 인연이라고 하는 자신의 처(무촌 無寸)를 구원하여 협시 보신불로 삼게 되는데 어머니(一寸)나 딸(一寸)을 보신불로 삼는 것은 좋지 않습니다. 그것은 이미 자신의 어머니는 자신의 아버지의 보신불이 되어야 하기 때문이며 딸 또한 해당 법신불의 인연이 따로 있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불교의 출가하지 않은 속가제자들에게 해당되는 일로, 출가한 제자인 경우에는 불가(佛家)의 원칙을 따르는 것이 좋으며 그러한 중에서도 "만가지 선행의 근본은 효(孝) - 부모은중경" 라고 하는 석존의 설법을 항상 기억함이 좋겠습니다.
불교의 최고 경지인 부처로 처음 되는 것과 도교의 최고 경지인 진인(眞人)으로 처음 되는 일은 그 방편이나 이름이 다를 뿐, 그 경지는 같습니다. 그러나 거시세계와 미시세계의 다름과 같이 그 세계들의 본류는 거의 대부분 다른 것에서 출발합니다. 거시세계의 미러(거울)효과로 더욱 거대한 세계를 수 없이 만들어 나가거나, 미시세계에서도 더욱 더 작은 수 많은 우주의 생성이 가능한데, 단순히 환상이거나 작다고 하여 무시할 수 없는 것은, 같은 수준의 해당 경지가 아니라면 확인할 방도가 없기 때문에 권능으로 작용할 수 있으며 그러한 권능은 부처의 열가지 지위인 "여래십호"와 같이 같은 부처라도 그 권능이 모두 다르며 창조주로 가는 경지는 또 끝이 없음을 알아야 합니다. 창조주 또한 끊임 없이 진보할 것이 여러가지 이유로 분명 해 보이고 그렇게 진보된 상황에서 그 자리를 다른 누군가에게 넘겨주게 될 것으로 판단 합니다.
이러한 일불승이나 진인 경지에서의 채널링 형태는 자신에게 꼭 필요한 경우에 이미 법계나 시스템을 충분히 이해하기 때문에 그것을 거스르지 않고도 누군가에게 채널링을 통하여 깨달음을 주거나 자신이 원할 경우에 다른 더 높은 경지의 인연과 닿아 (일불승이나 진인의 경지에 이르게 되면 이미 그러한 경지에 도달하게 한 인연이 있기 마련임) 교류를 청할 수 있으며 이것은 대자유를 획득하지 못하였거나 억지로 채널링이 되는 것과는 다른 입장이며 언제든 상위의 존재와 교류를 중단하고 싶을 때 중단 하겠다는 의사만 표시하면 그것으로 교류는 되지 않습니다. 상위 자아로 갈 수록 자유의지를 최대한 존중하기 때문입니다.
아래 열반경에 나와 있는 석존의 채널링 형태를 인용하면서 글을 마칩니다.
--- 열반경 인용 ---
그런데 아난다여! 이 세상에는 여덟 종류의 사람들이 있다.
곧 왕족(크사트리아), 바라문, 자산자(資産者), 사문, 사천왕천의 사람들,
도리천의 사람들, 악마에 속하는 사람들,
그리고 범천에 속하는 사람들이 그들이다.
그런데 아난다여! 나는 다음과 같은 사실은 확실하게 깨닫고 있다.
한때 나는 수백 명의 왕족들이 있는 곳에 갔었다.
그곳에서 나는 그들과 자리를 함께 하고 함께 말하며 담론(談論)했다.
그때 나는 그들이 이야기하는 소리나 그들이 이야기하는 억양만으로도
그들과 말할 수 있었다.
그리고 나는 여러 가지 가르침을 설하여 받들어 지니게 하고,
그들을 걱려하고 기쁘게 했던 것이다.
그런데 그들은 나의 이야기를 들으면서도 내가 누구인지 모르고 말했다.
"이러한 것을 말하다니, 이 사람은 도대체 인간일까? 아니면 신(神)일까!"라고.
거듭 여러 가지 가르침을 그들에게 설하여 받들어 지니게 하고,
그들을 격려하고 기쁘게 한 다음, 일어나서 떠난 다음에도
그들은 여전히 내가 누구인지도 모르고 말했다.
"방금 일어나서 떠난 저 사람은 도대체 인간일까? 아니면 신일까?"라고.
아난다여! 마찬가지로 다음과 같은 사실이 있음을 나는 확실하게 깨달았다.
한때 나는 수백 명의 바라문, 자산자, 사문, 사천왕천인, 도리천 사람,
악마의 권속, 범천의 권속들이 있는 곳에 갔다.
그곳에서 나는 그들과 자리를 함께하고 함께 말하고 담론했다.
그때 나는 그들이 이야기하는 소리,
그들이 이야기하는 억양만으로도 그들과 말할 수 있었다.
그리고 나는 여러 가지 가르침을 설하여 받들어 지니게 하고,
그들을 격려하고 기쁘게 했던 것이다.
그런데 그들은 나의 이야기를 들으면서도 내가 누구인지도 모르고 말했다.
"이러한 것을 말하다니, 이 사람은 도대체 인간일까? 아니면 신(神)일까?"라고,
거듭 여러 가지 가르침을 그들에게 설하여 받들어 지니게 하고,
그들을 격려하고 기쁘게 한 다음, 일어나서 떠난 후에도
그들은 여전히 내가 누구인지도 모르고 말했다.
"방금 일어나서 떠난 저 사람은 도대체 인간일까? 아니면 신일까?"라고.
어쨌든 아난다여! 이 세상에는 이상과 같은 여덟 종류의 사람들이 있느니라.
--- 열반경 인용 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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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 내용은 아래 주소의 댓글 대화 내용 이후에 연결되어 나온 글입니다.
유전
- 2011.06.06
- 23:35:36
- (*.163.232.122)
채널링에서 위 본문의 연각승 이상에 해당되는 체험이 시작될 때,
주의할 사항들로 도덕경의 대표적 2개의 장을 옮깁니다.
12장 보다 14장의 내용이 더 높은 경지에서 이해하고 가야 할 내용이며
14장 속에는 표면적인 이해 보다, 이희미 라고 하는 중첩된 뜻이 또 있습니다.
연각에서는 이러한 쌍둥이 효과, 중첩, 평행이론, 다중우주 등에서 볼 수 있는
중중무진의 뜻들이 나타나기 때문에 한가지 만으로 그것이 전부인양 판단할 필요가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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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12.05)
視之不見, 名曰夷, 聽之不聞, 名曰希, 搏之不得, 名曰微
보려해도 볼 수 없으니 이름하여 이(夷)라한다.
들으려해도 들리지 않으니 이름하여 희(希)라한다.
손에 쥐려해도 얻지 못하니 이름하여 미(微)라한다.
此三者, 不可致詰, 故混而爲一
세가지를 발자국 따라 이어라. 꾸짖어(새벽에) 이르는 것이 아니니
고로 합쳐서 위일(爲一)하라.
其上不嘄 其下不昧, 繩繩不可名
(嘄 부르짖을 교,口+鳥/木 새가 나무에 앉아 우는 모습)
위로 부르짖는것이(솟대) 아니며 아래의 어둠도(흑점) 아니니
줄줄이 묶어 매달아 놓은 끈으로도 이름(표시) 할 수가 없다.
復歸於無物, 是謂無狀之狀, 無物之象. 是謂惚恍
까마귀로 다시 돌아간 물건도 아니요
이것은 문서(편지)없는(남겨짐이 없는) 문서이니라.
물질(물건)로 된것이 없는 형상이니
홀연한 마음속의 빛이라 할 수 있다.
迎之不見其首, 隨之不見其後
우러러 맞이하려거든 머리만 있다고 단정하지 말며
따르려거든(발) 뒷모습만으로 지레 짐작 하지 말라.
執古之道, 以御今之有, 能知古始, 是謂道紀
옛우상을 잡아들이는 방식의 도였으며
이로써 공손하게끔 거느리고 있다.
옛날 처음 이룬것을 알게 되었나니
이와 같이 도의 실마리로 삼으라.
위의 해석은 다른 사람들과의 이해와는 상당히 다르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2300년전 시대 사람이 남겨 놓은 글이며 한자를 사용하였다고 해서 노자가 중국인이라는 단서는 어디에도 없습니다.
한국의 옛 땅에는 이두식 표기법이 있었으며 그 이전에는 또 그 이전 방식으로의 표기가 있었을 것입니다.
특히 윗글에서 차삼자(此三者), 세가지를 발자국처럼 따라가라 라고 말한 이희미(夷希微)의 뜻인 동방의 활든 이를 바라보며 숨겨 놓는다 라는 의미를 생각 해 보면 노자의 본명으로 알려진 "李 耳" 라는 사람은 한국 땅 태생일 확률이 매우 높습니다.
또한 위 도덕경 14장의 해석과 같이 솟대와 태양숭배(흑점) 삼족오 성황당등 매우 많은 종교 문화가 한국 고대 문화와 흡사 합니다.
이글은 특히 땅의 역사점 관점으로 보면 많은 의미를 이해 할 수 있으나 다른 글에서 밝힌 바와 같이 도덕경의 해석은 어느 한가지로만 이해하는 무리수로는 전체적 해석을 할 수 없는 난이도가 존재합니다.
식자들은 이러한 해석을 어리석음으로 치부하다가 뒷마무리 해석은 아에 포기하는 엉터리 해석으로 결론을 맺기 쉽게 되어 있습니다. 도저히 완역을 할 수 없는 경전입니다.
지금 나온 모든 해석을 한 식자들에게 도덕적 양심을 걸고 묻고 싶습니다. 앞의 해석과 뒤의 해석의 차이가 오류로 작용하여 전 영역에 걸쳐 드러납니다. 스스로 오류임을 알면서도 마무리 지(을수 밖에 없)었다는 것을 부인 할 작자는 없으리라 봅니다. 전부 그러합니다.
그러나 진정 도덕경을 오랜 기간 연구 해 본 자이거나 도덕경 전체 내용을 여러 차례 읽어 전체적 흐름을 알고 있는 자라면 아마 새로운 차원에서 내 해석이 다시 이해되리라 생각합니다.
한가지 이글을 쓰면서 걱정이 되는 사항이 있다면 도덕경의 해석에는 많은 인내와 언어적 혼란을 수 없이 겪은 후에 라야 가까이 할 수 있는 책이라는 점입니다. 따라서 이러한 혼란을 잘못 이겨내거나 상식 밖의 일에 집착한다면 자기 정체성을 잃을 수가 있습니다.
그러한 일이 생기거나 혹여 번뇌라도 생긴다 싶은 사람은 각자의 종교에 따라 의지하거나 자신에 대한 믿음으로 극복해야 합니다. 이것은 도덕경을 스스로 해석 하고자 하는 자에 대한 경고이며 극복 과제입니다.
이 제목의 글을 시작한 이유는 "오온개공에 관하여" 라는 글에 이어 이희미에 대한 글을 간단히 덧붙이고자 다른 분의 해석을 채워서 사용하였으나 다시 14장 전체를 해석해야 하는 필요성이 대두되면서 다른 분의 글은 인터넷 블로그의 메모로그로 옮깁니다.
인터넷상의 다른 해석과 많은 비교를 하면서 읽기를 바라며 특히 메모로그로 옮겨진 글은 수기식 다큐멘터리로 나와 비슷한 생활 속 체험이 생생하게 쓰여 있어 도덕경을 해석 과정에 많은 도움이 되리라 봅니다.
2006.12.06
"오온개공에 관하여" 에 도덕경 12장의 해석을 일반적으로 하였는데 부실한 느낌이 들어 이곳에 12장 해석을 덧붙입니다. 이곳에 붙이는 이유는 오온개공은 불교식 용어로 가급적 불교적 설명이 흐려질까이며 위 14장과 같이 12장을 이해하면 내 도덕경 해석이 한결 설득력을 갖으리라 봅니다.
도덕경 12장
五色令人目盲, 五音令人耳聾, 五味令人口爽
馳騁畋獵令 人心發狂 難得之貨令人行妨
是以聖人爲腹不爲目, 故去彼取此
오색 방울빛은 사람의 눈을 멀게하고 (五色令人目盲)
오음 방울소리는 사람의 귀를 먹게하고 (五音令人耳聾)
오미 방울맛은(식탐) 사람의 입을 상하게 하고 (五味令人口爽)
달리고 달리는 모든 수렵신호(방울)는 사람의 마음을 발광케 하고
얻기 힘든 재물로 방울을 달면 사람의 행동에 방해가 된다.
(馳騁畋獵令 人心發狂 難得之貨令人行妨)
그러므로 성인은 몸을 위하되 보기 좋은것만 찾지 않으니
고로 껍질(형체)은 지나가게 하고 발자국(흔적,경험)을 취한다.
(是以聖人爲腹不爲目, 故去彼取此)
방울은 사람의 신호가 아닌 기물을 이용한 신호체계를 뜻하며 특히 짐승들은 맛을 통한 신호체계 또한 많이 발달되어 있습니다.
2006.12,07
파자식 고문자 해독에 관하여는 그 당시 사람들의 관습과 행동 방식을 이해하는 것이 가장 빠릅니다. 수천 년간 이어온 중국 문자에 정통한 이들은 오히려 방해를 받습니다.
서서히 변해간 문자의 어순과, 지역마다 다르게 뜻풀이를 해오는 방식으로 초창기 문자를 오늘날 한자풀이식 공자의 책만을 기준으로 해석해 나간다는 것은 그 자체의 한계성이 존재합니다.
시대 역순으로 거슬러 올라가는 방식도 있을 수 있지만 그림문자 라는 형식의 원형을 이해 할 수 있는 자가 가장 정확 할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차라리 미술가가 옛사람의 방식을 이해하고 도덕경을 해독 하는 것과, 어느 시대, 어느 나라, 어느 지방 출신의 사람이 쓴 것인지 확인되지 않는 상태의 도덕경을 단순히 한문표기라고 해서 다른 공자 논어 해석식 풀이로 하는 차이는 별반 다를 게 없어 보입니다.
그러므로 한문학자들의 권위를 가지고 도덕경 해석을 비방하는 어리석음을 행하지 않기를 바랍니다. 맞고 틀리고는 또 다른 역사적 사료들이 출토되어 증명 되게 됩니다. 곧 그리 되리라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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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전 : 지금 게시판이나 사회적으로 ufo 논란이 많은데,
도덕경 형식의 UFO 해석을 해 보겠습니다.
" ㅕ ㄹ ㅐ "(키보드 자판에서 ufo에 해당되는 자판을 한글 자판으로 치면 나오는 글자)
" ㅕ ㄹ ㅐ " 를 불교의 " ㅇ "(공사상에 해당되는 한글 자음)을 붙이면
" ㅇ ㅕ ㄹ ㅐ "
믿거나 말거나, 그리고 재미삼아 썼습니다.
이것을 가지고 또 여래의 한자음 표기에서 팔리어가 어떻고 산스크리트어가 어떻고 하면 재미 없습니다. (2008/07/31)
유전
- 2011.06.07
- 00:03:50
- (*.163.232.122)
제법실상 연기법의 현상에서, 재미 있으라고 하나 더 올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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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11.30
10월 즈음에 공중파방송 오락 프로그램 중에서 계산기로 12345679 곱하기 9를 하면 111,111,111 이라는 숫자가 나온다고 하면서 신기하다는 뜻으로 재미를 더하고 있습니다.
수학의 이치를 설명하는 것으로 마무리 하기에 무심결에 따라 해 보았습니다. 계산기로 쳐보니 역시나 저 숫자대로 나옵니다. 그런데 저 숫자 중에 유독 8 이라는 숫자가 없습니다.
그래서 다른 것을 시도 해 보았습니다. 12345679 곱하기 8을 쳐보았더니 98765432 라는 숫자정렬이 나옵니다. 1과 0 이라는 숫자만 빼고 나란히 정렬됩니다.
물론 8진법 이치로 저렇게 되는 것이 당연하다 할 것입니다. 그런데 내가 볼 때 처음 9를 곱한 값보다 더 놀라운 결과치의 정렬입니다. 이런 사항을 다른 누군가는 알고 있을까 궁금합니다.
알고 있었다면 8관련 수리법칙도 함께 소개 되었으리라 봅니다.
날아라
- 2011.06.07
- 12:07:04
- (*.139.108.170)
커피(카페인성분)를 많이 마시면 환청이 들릴 수 있다는 연구 결과가 발표되었습니다.
http://media.daum.net/culture/view.html?cateid=1046&newsid=20110607114527643&p=hankooki
별을계승하는자
- 2011.06.07
- 21:14:34
- (*.41.147.241)
자신이 닦은 체계는 중요하고 소중합니다 그러나 다른체계들까지 너무 자신이 선호하는 체계에 섞어놓을 필요는없다고생각합니다. 그걸 섞어서 새로운 체계를 만들어서 대중을 인도할수있을정도의 능력이 되는게 아니면 더더욱 조심해야합니다..지금 이게시판엔 도양수행과 서양수행법이 너무 극렬하게 대립해서 제가 좀환기는 시켜놓은상태이긴하나....아직도 아눈나키식 네트를 전우주가 매트릭스인양 착각하거나...마왕이나 그힘을 구원 구극 상환시키는 승화의 대상으로보지않고 경계만한다던가 그대로 전통적인 지구몇천년수준의 레벨을 그대로 답습합니다..안타깝습니다. 당연히 상위의 메시지나 깨달음은 일맥상통하나 그걸 꼭 자신이 선호하는 체계안에 넣어서 은연중 그것이 더우월하다는 식의 취지는 곤란하다고생각합니다...저도 불교 도가 물론 선호하나 기본적으론 역시 예수님의 사랑의 메시지가 좀더 잘들어옵니다 또한 우주문명메시지나 채널링 메시지들도 불교나 도가 의 정수에 비견해서 전혀 떨어지지않습니다만 도력싸움 지식싸움으로 변질되질 않길 바랄뿐입니다. 그냥 자신이 선호하는 체게에선 이렇더라..어떻게 생각하냐 혹은 이런 멋진 이야기가 있는데 나누어보자 너희 얘기는 어떠냐 <<<<<<<<이게 당연한건데..지금은..;;;
별을계승하는자
- 2011.06.07
- 21:24:57
- (*.41.147.241)
운명학은 따로 조금공부한 바가 있어서 말하면 주역이든 서양의 점성학이든 기본적으로 점을 치고자 만들어진 학문이나 체계가아니며 우주의 현상을 공부하다보니 자연스럽게 점복이 딸려온것입니다. 얕게 공부한자들이 그걸로 이용해먹은거죠. 현재 지구문명이전에 문명에서 전해진 체계들이며 기본적으로 대우주와 소우주가 하나라는 간단하고 쉬운 깨달음같지만 무척어려운 깨달음속에서 계속 발전해나간것들입니다. 궁극적으론 행성신들과의 합일과 교류로 우주적 의식을 확장하고 우주의 에너지적 속성뿐만아니라 깊은 깨달음적 속성들까지 수렴해야하는 심오한 체게들입니다. 전 서양쪽 점성학을 더선호했지만 기회가 닿는다면 주역이나 자미두수같은 동양체게들도 공부해보고싶긴합니다.
별을계승하는자
- 2011.06.07
- 21:42:01
- (*.41.147.241)
아뭏든 불교나 도가도 굉장히 심오하고 재미있는 체계입니다.. 공과 허무라는 손가락을 보지않고 달을 잘 볼수만있다면 더할나위없는데 대부분 손가락에 헤메는경우가 많고 달을 보더라도 보름달이아닌 월식을본다던가??';;;
아뭏든 전 기본적으로 방편으로서 에고의 소멸이아닌 순수한 에고의 성장과 상승을 통한 정화와 승리쪽으로 가닥을 잡고잇습니다. 그와중에 괴물도만나고 마왕도만나겠죠 다 쓰러트리면됩니다.
일단 기본목표는 포에부스 로 정했습니다. 태양의 신 아폴로 의 별명이죠
저주를 해소하고 부정한 것을 정화하며 무의식의 암흑세게로부터 생겨난 무시무시한 장벽에서 인간을 해방하는 힘
자아가 갖는 가장 영광스런 힘이며 지하세계 구렁이 피톤을 정복한 자이며 인간적 깨달음으로서의 신의 그릇.
에고를 버리는것이아니라 단련하고 정화함으로서 보다 깊은 근원을 이해하고 공감하고자합니다.
절정에 다라랏을때 무나 공 허무로 보일수도 있지만 인간적인 ''말;;일뿐입니다 끝없는 충일감과 절정의 무아지경을 보고
그래 역시 버리고 허무해져야해 공이 최고지 하면서 축구공차고잇으면 곤란하거든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