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전 2011.04.30 11:10:09
발가락 하나가 썩어 들어갈 때 소중한 발가락이지만 그 발가락으로 인하여 다른 나머지 발가락 까지 썩어 들어갈 것을 염려하는 경우에 해당되며 이러한 경우에 있어 때로는 나중에 발가락이 문제가 아니라 발 전체를 잘라내야 하는 경우나 아에 목숨까지 잃게 되는 경우도 확실히 있기 때문입니다. 자비와 사랑은 진리를 찾아가게 하는 길이기는 하지만 의(義)라고 하는 수단을 필요로 합니다. 무조건적이고 분별 없는 자비와 사랑은 오히려 상대를 죽이는 길에 이르게도 하며 상대만이 아니라 전체가 죽음으로 이르게 할 수도 있습니다. 공의가 필요한 이유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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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신나이 메시지에서 공의(公義)에 대한 부분
필명: 유전
http://cwgkorea.net/zbxe/454566
2011.04.30 12:43:43
신과 나눈 이야기 - <家長의 길>
‘삶이 두렵고 혼란스럽다’ 라고 느끼는 것은 우리가 “결과에 집착하기 때문”이다.
삶에는 “두려움”이 존재하지 않으며, 단지 “두려움으로 느껴지는 것”일 뿐이다.
“가장의 길”은 원래 힘겹고 험난한 길이다.
혼자 있다면 ‘아무 것도 원하지 않기’가 쉬우나, “사랑하는 사람들”이 딸려 있을 때,
그들에게 최대한 “잘해주고 싶은 욕구”는 아주 ‘자연스러운 일’이다.
우리가 “삶의 목적”을 소위 ‘안정을 얻는 것’으로 안다면, 돈이 없음을 “불행”으로 볼 것이다.
그러나 무엇을 ‘급료’로 볼 것이며? 무엇을 ‘일의 목적’으로 볼 것이냐? 에 따라
행복과 불행의 관계는 180도 달라질 수 있다.
“신의 급료”, 우리가 ‘신을 위해 일할 때 받게 되는 급료’에는 물질적 행복보다 훨씬
‘더 많은 것’이 들어 있다. 더불어 ‘물질적 안락’ 역시 우리의 것이 된다.
어느 누구든, “신의 급료”가 주는 “영적 평온”을 일단 한번 누리고 나면,
우리는 더 이상 ‘물질적 안락’에 연연하지 않게 되는 자신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심지어 “가족의 물질적 안락”까지도 더 이상 우리의 관심을 끌지 않을 것이다.
일단 우리가 “신의 의식까지 올라서게 된다면”,
우리는 우리가 “책임져야 할 다른 사람의 영혼이란 없다”는 것과,
모든 영혼이 평온하게 살길 바라는 건 칭찬받을 일이긴 하나,
“각자의 영혼은 순간마다 자기 나름의 운명을 선택”해야 하고,
또 실제로 “선택하고 있다”는 걸 이해하고 깨닫게 될 것이다.
물론 남을 고의로 불행에 빠뜨리거나, 학대하거나 파멸시키는 것은 고귀한 행동이 아니며,
또한 자신에게 의존해야 하는 사람들, 자신의 도움을 필요로 하는 사람들,
그렇게 하도록 “자신이 선택하고, 만들어 놓은 인연자”들을 무시하는 것 역시 똑같이
“온당치 못한 짓”임이 명백하다.
그러나 우리가 해야할 일은 “그들을 자립하게 만드는 것”이다.
그들에게 “나 없이도 살아가는 법”을 가능한 한 빨리 완벽하게 가르치는 것이 필요하다.
왜냐하면 그들이 살아남기 위해 “나를 필요로” 하는 한,
나는 결코 그들을 “축복”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자신이 “그들을 진실로 축복하는 것”은 오직 “그들이 나를 불필요한 존재로 느낄 때” 이다.
같은 의미로 “신에게 더없이 기뿐 순간”은,
우리가 “신이 전혀 필요하지 않다”고 깨닫는 바로 그 순간이다.
종교나 성직자들이 가르친 “신”은 분노하고, 질투하고, 의존하기를 요구하는 신이었으나,
이런 존재는 신성을 향한 신경증적인 “대용품”이지 결코 신이 아닌 것이다.
부모로서, 배우자로서, 연인으로서 우리는 자신의 사랑을 꽉 붙들어 매는 “아교풀”로 만들지
말고, 처음에는 끌어 당겼다가, 돌아서면 반발하는 “자석”이 되어야 한다.
우리에게 다가온 사람들이, 살아 남으려면 우리를 꽉 붙들어야 한다고 믿는 일이 생기면,
이것은 “진리”에서 멀어지는 것이요, 다른 사람에게 “해로움”이 되는 것이다.
“사랑하는 이”들을 “사랑으로 세상에 내 보내라!”,
그리고 “그들 ‘자신이 누구인지’ 확실히 체험하게 하라!”
이렇게 할 때야 비로소 우리는 “진정한 ‘사랑’을 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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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전: 위 신나이 메시지에서 소제목으로 되어 있는 "가장(家長)의 길" 이라는 뜻을 조금 더 생각 해 보면, 위의 번역본에서 혼동적으로 쓰이고 있는 "나"에 대한 구분을 쉽게 파악할 수 있으리라 보여진다. 특히 위 메시지의 끝 부분을 세번 정도 다시 읽어 본 내 생각을 밝혀 보면, "진리"에서 멀어지는 때에는 "아교풀"로 감싸 줄 것이 아니라 진리에 대하여 돌아서는 것이 확실하다고 판단될 때 반발하는 자석처럼 내 쳐야 한다고 쓰여 있다. 이것은 다른 사람에게 "해로움"을 줄 뿐이 아니라 방치할 경우 가족들 모두를 사망에 이르게 하는 지름길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이것의 판단을 가장이 해야 한다는 것이고 이러한 가장으로의 선출은 고진재(고도로 진화된 존재)로 나아갈 수록 세속적인 태어난 년도에 따른 나이에 의한 대접이나, 대중적 수준 이하의 집단적 의견 수렴 보다, 창조주의 진리와 가장 가깝다고 생각 되는 선지식이 맡아야 한다. 불가에서는 가르치던 제자가 어느 순간 깨달음을 증득하여 스승 보다 높은 선지식이 되면 주장자 라고 하는 막대기(지팡이)를 제자에게 넘겨 주고 제자의 밑으로 들어가는 것을 당연하게 생각한다. 아, 물론 나는(유전) 아무리 선지식이라 대중들에게 인정을 받는다 하여도 그러한 역할을 하고 싶지는 않다. 현재까지 제자도 두지 않는 이유 중의 하나이다. 나라가 전쟁 등의 이유로 완전히 망할 위기의 때 이거나 지구가 멸망하는 경우가 된다면 고려 해 볼 생각은 있다.
하여튼, 가장이 판단을 잘못하여 그 가족의 무리들을 제대로 인도하지 못하면 그 가족들 전체가 사망에 이르는 길로 인도 될 수도 있다는 점은 명심해야 할 일이다. 첨언 하자면, 자식들에게 자비와 사랑을 더 베풀게 되는 입장에서의 여자 가장의 경우는 사실 잘 생각 해 보면 그 여자 가장의 불행이다. 자식들에게 때로는 대마왕으로 비춰질 수 있는 판단들 때문에 스스로도 괴로운 일이고 자비와 사랑의 방편을 포기해야 하기 때문이다. 자비와 사랑을 위한 다른 쪽 방편인 義까지 동시에 시행 하기란 어려운 일이고 그것을 잘 했다 하여도 자식들은 결코 그것이 같다고 생각하는 경우가 거의 없이 그냥 아버지를 대마왕이라 부르는 자식들과 같이 역시나 마귀할멈으로 인식 하기가 쉽다. 그렇게 인식될 때 남자 보다는 여자가 감정적으로 상처를 더 받기 때문에 중요한 결정에서 판단이 더 어렵고 스스로도 더 불행 하다고 느낄 수 있다.
신나이 메시지에서 가장의 역할은 신약에서 "돌아 온 탕아의 비유"와 같은 경우이다. 메시지에서 종교의 부정성이 언급되어 있는데, 신나이 전체 메시지에서는 석존과 예수님 이름을 그대로 호칭하며 높은 존재로 설명 되어 있고 인류 또한 그러한 길을 가야 한다고 주장한다. 다만 기독교에서 잘못 알려져 구약과 신약이 함께 전하여진 상황에서 많은 부정성이 나온 것에 대해서는 앞으로 수정 되어야 할 것으로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