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의 본성과 범죄심리의 형성과정
□ 인간의 본성 1. 서설 水深可測 人心難測이라 하여 인간의 본성(本性)에 대해 열길 물속은 알아도 한 길 사람 마음은 알 수 없다는 말이 있다.사람의 본성(本性)이 어떠하기에 이렇게 설(說)이 많을까? 인간의 본성은 사람의 마음에서 나오는데 인간의 마음에는 자비심, 증오심 등 다양한 기질의 성품이 때 장소에 따라 달리 나온다. 2. 동양적 인간본성의 분석 1) 맹자(孟子)는 사람의 본성(本性)은 선(善)한데 환경의 영향으로 불선(不善)해진다고 했다. 맹모삼천지교(孟母三遷之敎)란 말로 미루어 맹자는 어머니의 영향으로 1)성선설(性善說)을 주장했나 보다. 맹자는 선(善)한 본성을 유지하고 不善하지 않기 위해서는 좋은 환경이 중요하다고 했다. 사람에게 큰 영향을 주는 환경으로는 가정과 직장, 마을과 친구 등을 들었다. 그리고 어떤 기술을 익혀 어떤 일에 종사하느냐에 따라 사람의 선악이 결정된다는 것이다. 2) 공자(孔子)는 사람의 성(性)은 서로 비슷하지만 습(習)에 의해 서로 달라진다고 했다. 즉 성품은 후천적인 습관(習慣)에 의하여 선하게도 악하게도 된다고 보았다. 그래서 어려서부터 부단히 좋은 습성을 길러야 한다는 것이다. 3) 순자(荀子)는 사람의 본성은 이(利)를 좋아하고 감각적 욕구를 충족시키려는 본능이 있어 악으로 기울어진다는 성악설(性惡說)을 주장하였다. 그리고 이러한 악한 성품을 바로 잡기 위해서는 교육이 필요하다고 역설했다. 그래서 인의(仁義)를 학습하고 실천하기를 끊임없이 반복하면 선해진다는 것이다. 4) 묵자(墨子)는 소염론(所染論)에서 인간의 본성은 없고 백지와 같아 여기에 후천적으로 물들여지는 것이라고 했다. 인간의 행동은 욕구로부터 나오며 이 욕구에 의해 물들여진다. 임금이 훌륭한 신하들로부터 올바르게 물들여야 지면 성군이 된다고 주장했다. 즉 근묵자흑 근주자적(近墨者黑 近朱者赤)이라는 것이다. 3. 종교적 입장의 인간 본성 1) 그리스도교의 인간본성 그러면 그리스도인이 본 인성(人性)은 어떤가? 그리스도교의 인성은 창세기에서 찾아볼 수 있다. 태초에 사람은 하느님의 모상으로 창조되었다. 하느님의 모상이란 외적이 아닌 내적인 모습이다. 교회에서 ‘하느님은 사랑이시다.’ 라고 가르친다. 즉 그리스도교에서는 인간의 존엄성을 강조하면서 인간이 존귀한 까닭은 하느님의 모상인 ‘사랑’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라 것이다. 하느님이 주신 ‘사랑’을 실천하기 위해 용서하고 베풀 때 인간은 선(善)해지고, 탐욕에 사로잡혀 남을 배려하지 않고 이기심에 빠지면 인간은 악(惡)해진다. 인간 구원의 열쇠는 바로 사랑에 있다. 2) 불교에서의 인간의 본성 불교는 중도사상에 따른 변증법적 통일을 기하였는데 즉 외적 인간관으로 육체적 존재의 인간을 인정하고 동시에 내적인간관으로 정신적 존재의 인간도 인정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身 과 心과의 변증법적 통일이 석존의 인간관의 기초가 되는 것이다. 이에 따르면 인간은 자기인식, 자기반성에 의하여 자각단계에 따라 객관적으로 世間, 出世間, 出出世間이라하고 인격적으로 표시할 때 凡夫, 羅漢, 菩薩이라고 하는데 세간에 있으며 자기에 대한 반성도 자각도 없는 미자각적 상태인 범부는 육체생활만이 생활의 전체인 것으로 생각하고 名聞, 利養, 資生 등에 집착하여 三毒心(貪慾, 瞋恚, 愚癡)과 五慾(財慾, 色慾, 飮食慾, 名譽慾, 睡眠慾)을 자행하는 慾塊라고 한다. 인간은 기본적으로 욕심의 덩어리인 욕괴이므로 이런 욕심을 채우기 위하여 죄를 짓고 욕망이 채워지지 않으면 괴로워하도록 되어 있다. 또한 인생은 一切皆苦라 하여 인생 4고인 生老病死와 愛別離苦(사랑하는 사람과 헤어지는 괴로움), 怨憎會苦(원망스럽고 짜증스러운 것과 만나는 괴로움), 求不得苦(구하는 것을 얻지 못하는 괴로움), 五陰盛苦{인간을 구성하는 5가지 요소인 오음(色受想行識)에서 비롯되는 고통}가 있다고 한다. □ 범죄심리의 형성과정 1. 개념 1)심리학의 의의 심리학이란 연구주제와 대상에 따라 변하는데 심리를 강조하는 것과 행동을 강조하는 것, 인간과 인간사 전체를 강조하는 것으로 구분할 수 있다. 심리학이란 문자가 의미하는 바와 같이 마음의 이치를 따지는 학문으로 인간의 마음(mind), 심리(psycho), 정신(spirit)을 학문적이고 체계적으로 연구함으로써 이들의 구조를 알아보고 어떻게 작용하고 기능하는지를 알아보는 학문이다. 따라서 심리학의 궁극적인 목적은 인간의 심리만을 이해하려는 게 아니고 인간 전체를 알고 이해하려는 학문이기 때문에 인간의 내부 심리뿐만 아니라 인간의 행동까지 관심을 갖고 연구대상에 포함 시켰다. 결론적으로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기 때문에 “심리학은 사회적 존재인 인간의 심리와 행동을 과학적으로 연구하는 학문”이다. 2) 범죄심리학의 의의 범죄심리학은 인간의 범죄행동을 이해하고 설명하는데 기여하는 심리학, 사회학, 법학, 인류학, 생물학, 의학 등을 간학문적. 통합심리학적 접근이 요구되는 학문으로 연구범위와 대상이 광범위하기 때문에 일의적인 개념정립이 어렵고 학자에 따라 약간씩 상이하나 “범죄자의 행동과 정신과학을 심리학적인 이론을 통하여 과학적으로 연구하는 학문”이란 점에서 공통되어 결론적으로 범죄심리학은 범죄자의 심리와 행동을 과학적으로 이해하고 이를 바탕으로 범죄예측, 범죄예방, 범죄수사, 재판, 교정 등에 적용하는 응용심리학의 한 분야라고 정의할 수 있다. 2. 범죄심리의 형성과정 1) 프로이드의 정신분석이론 가. 기본개념 기본적인 개념인 “심적결정론의 원리(principle of psychic determinism)는 인간행동은 어떠한 것도 우연하게 일어나는 것은 결코 없다고 하여 신체적이든 심리적이든 인간의 모든 행동은 행동에 선행하는 그 무엇이 있기 때문에 일어나는데 무의식이 그 원인이라는 것이고 무의식의 원리(principle of the unconscious)는 인간의 사고, 감정, 행동을 실제로 지배하는 것은 무의식이라고 하며 이런 무의식은 개인의 정신계의 일부로써 개인의 가장 원초적이고 가장 덜 성숙된 소원, 충동 및 욕망들로 구성되는데 이러한 구성요소들은 의식적인 경험으로 인해 무너지면서 범죄심리 형성. 나. 성격 역동론 사람의 성격이 2)원초아(原初我 : id), 자아(自我 : ego) 초자아(超自我 : superego)로 구성되는데 서로 고유한 기능을 담당하면서 상호작용을 통하여 행동을 규제한다. 가) 원초아(id) 성격의 가장 기본적인 원천으로 생물학적 동기의 저장소로써 프로이드가 지적한 생의 본능인 성적본능과 사의 본능인 공격성으로 구성되어 있다. 다시 말해 원초아는 본능적 충동에 의해 배고픔이나 갈증욕 또는 성욕 등 즉각적인 만족을 추구하는데 쾌락원리에 따라 기능한다. 프로이드에 따르면 사람이 꿈속에서 생각하는 대상이나 사건들도 원초아의 충동을 충족시키기 위한 노력의 하나라고 지적하며 일차과정사고(primary process thinking) 라고 부른다. 나) 자아(ego) 유아기때 원초아의 심상으로부터 발달하며 원초아적 충동이나 욕구에 대해 현실을 고려함으로써 원초아의 제반욕구를 충족하도록 하여 주는 점에서 이차과정사고(secondary process thinking)라고 하는데 이는 일차과정사고에 의해 형성된 심상을 현실과 비교 검토하는 현실적 논리적 성질을 가지고 있고 나아가 어떻게 충동적인 만족을 구할 것인가를 계획하도록 하는 성격의 실행자 역할을 한다. 다) 초자아(superego) 부모나 교사, 가족, 경찰 등에 의한 사회화 과정을 통해 배운 사회적 가치나 도덕성이 내면화된 것이다. 즉 초자아는 원초아의 쾌락추구경향을 억제하고 사회의 행위에 대해 옳고 그름을 따지는 윤리적 판단을 행하는 기능을 하는 도덕원리를 따른다. 이러한 초자아는 내용면에서 양심(conscience)과 자아이상(ego-ideal)으로 구성되는데 양심은 자신의 행동에 대한 죄책감이나 수치심을 느끼도록 함으로써 행동을 자기통제 하도록 처벌에 의해 형성되고 자아이상은 사회적으로 승인되는 방향으로 자기완성을 기하도록 보상에 의해 형성된다. 다. 성격발달론3) 가) 구순기(oral stage) 생후 1년까지 기간을 말하는데 초기에는 젖을 빠는 쾌감을 느끼고 후기에는 깨무는 만족을 구하는데 초기 욕구 충족이 과하거나 부족하면 구순적 고착현상으로 담배나 술을 즐기거나 말을 많이 하며 의존적 수동성을 보이고 후기 행동이 고착되면 남을 심하게 비판하거나 꼬집거나 비난하는 구순 공격적 성격을 보인다. 나) 항문기(anal stage) 1세에서 2세까지 배변훈련을 통해 부모의 권위와 최초로 접촉하게 되어 원초아의 욕구가 제약되는 시기. 배변을 통한 성적쾌감과 배설을 참음으로써 쾌감을 구하는 유지기가 오는데 배변기에 성격이 고착되면 불결, 무질서, 낭비 등의 성격을 초래하고 유지기의 성격고착은 지나친 강박성, 동조성, 자기억제, 결백성이나 깔끔한 성격을 가져온다. 다) 남근기(phallic stage) 3~5세까지의 기간으로 자신의 성기를 만짐으로써 큰 성적 만족을 얻는다. 남아는 구순기로부터 어머니에게 성적애착을 갖는 외디푸스 콤플랙스(oedipus complex:근친상간)를 경험하면서 아버지에 대한 거세불안을 느끼며 아버지와 닮으려 하는 동일시라는 방어기제를 사용함으로써 불안감 감소하는데 이러한 동일시 과정을 통해 아버지의 행동패턴만 모방하는 게 아니라 행동의 옳고 그름에 대한 윤리적 판단까지 배움으로써 초자아가 형성되는데 외디푸스 콤플랙스가 해소되지 못하고 무의식 속에 잠재하게 되면 어머니와 같은 연상의 여인을 사랑하기도 한다. 한편 여아는 자신의 성기가 거세된 것으로 생각하고 열등감을 가지며 아버지를 사랑하고 어머니를 질투하게 되는 일렉트라 콤플랙스(Electra complex) 현상이 나타나는데 어머니와 동일시되는 승화과정을 거치며 초자아가 형성되는데 남근적 고착이 심한 사람은 바람기, 이성에 대한 공포, 무시나 무관심과 허영. 자부심과 만용, 명랑함이 있거나 반대로 자기증오, 겸손, 슬픔 등이 있다. 라) 잠복기(latent stage) 6세부터 시작하여 사춘기의 초기까지 진행하는 과정으로 성적관심이 억압되어 성적쾌감을 추구하는 행동이 잠재되는 시기로 외부세계에 관심이 많다. 마) 성기기(genital stage) 13세 이후 사춘기 이후의 단계로써 생식능력이 생김으로써 사랑의 갈망이 다시 고개를 들지만 자아와 초자아가 강해져 다양한 방어기재로 사용되는데 이성에 대한 관심이 커지고 가족의 울타리를 벗어나 타인을 사랑할 수 있게 된다. 2) 성격과 범죄심리 가. 성격의 의의 성격이란 한 개인이 환경에 대한 적응을 결정짓는 특징적인 사고방식과 행동양식 또는 개인이 환경에 따라 반응하는 양식으로 타인과 구별되게 하는 독특하고 일관성 있는 사고, 감정 및 행동방식의 총체라고 정의 하는데 그러면 이와 같은 성격은 어떻게 형성되는 것인가? 인간이 태어나면서 부모로부터 물려받은 생득적(生得的) 유전적인 생물학적인 요인과 성장함에 따라 사회 환경으로부터 후천적으로 습득하게 되는 획득적, 경험적 학습요인이 사로 상호작용하는 가운데 형성된다고 볼 수 있다. 가) 요첼슨과 세미나우의 연구 범죄자의 사고유형을 파악한 결과 범죄자의 성격은 사회경제적 또는 환경적 요인의 산물은 아니라고 하면서 주로 거짓말을 잘하고, 불안전한 자기상, 상해. 모욕에 대한 두려움과 화를 잘 냄, 허무맹랑한 낙천성, 왕성한 에너지, 남의 물건을 자기 것으로 여기는 성격특성을 가지고 있다. 나) 윌터스와 화이트의 연구 잘못된 비합리적 사고가 장기간에 걸쳐 법을 위반하는 생활형범죄자의 특징은 자기애적 경향성이 강해서 세상을 자신의 이익과 쾌락을 위해 존재한다고 생각하고 감정과 기분의 변화가 심하며 자신의 범죄행동을 외부적 요인에 의해 귀인 한다고 정당화 시키며 지나치게 낙관적인 특징을 가지고 있다고 함. 다) 아이젱크의 연구 범죄성에 대한 상호작용이론을 제안하며 범죄행동은 환경조건과 유전적 성격특성이 복합적으로 작용한 결과이다. 그에 따르면 범죄는 빈곤한 사회적 조건, 저학력, 실업, 유전적, 생물학적인 요인에 의해 발생한다고 하며 성격차원을 내향성, 외향성, 신경증 등 3가지 차원으로 구분하고 대부분의 범죄자들은 신경증적 외향성인 사람이 많다고 한다. 3) 반사회적 성격장애와 범죄 감정의 미성숙과 함께 타인의 권익을 침해하는 반사회적 행동이 만성적으로 반복되는 이상성격의 소유자로 겉보기에는 아무 이상이 없는 것처럼 보이나 신의와 성실이 부족하고 거짓으로 가득 찬 내면적 인격을 가지고 있는데 타인이 책망 시에는 핑계와 거짓말로 모면하고 잘못했다는 느낌을 갖지 않는다는 점에서 일반적인 범죄자와 구별되는데 무책임과 부끄러움에 대하여 무감각한 특징을 가지고 있다. 가. 반사회적 성격장애의 진단 일반적으로 반사회적성격장애의 진단은 첫째 행동장애가 15세 이전에 출현해야 하고, 둘째 뚜렷한 행동장애가 사회기능면에서 반복적으로 나타나야 하며, 셋째 다른 정신질환은 없어야 한다 는 조건을 갖고 있는데 강력범죄자의 대다수 차지 나. 사이코패스(psychopath)와 범죄4) 사회병리 또는 반사회적이고 공격적이며 반사회적행위에 대한 죄책감을 느끼지 못하는 사람들이며 또 타인과의 애착심을 유지할 수 없는 특징을 가진 사람들을 말한다. 이들은 좌절하였을 경우 걷잡을 수없이 공격적으로 돌변하고 충동을 승화시키거나 조절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지 않으며 타인에게 상해를 가한 후에도 불안감이 없고 후회를 하지 않는 특성을 가지고 있다. 3. 결론 범죄심리의 형성과정은 이렇다. 라고 일의적인 설명이 불가능하다고 본다. 태어나면서 부모에게 물려받은 유전적 요인이나 유아기에 부모, 가족 등을 통해 모방교육을 받으며 체험한 사실과 욕구간의 갈등, 청소년기에 학교 사회 등 환경과의 갈등 등을 반복적으로 경험하면서 수용되거나 배척되는 과정에서 윤리, 도덕성과 인내심, 성실성 등 개인의 특별한 성격이 형성되는데 특정한 욕구를 충족시키기 위하여 감수하여야할 불이익이 작다고 판단되거나 이익형량을 판단할 수 있는 기준이 없거나 잘못된 경우 범죄심리 형성은 더욱 강해 질 것이다. 이렇게 형성된 범죄심리는 이를 억제하는 방어기제가 작동하면 범죄는 어느 정도 억제되지만 특별한 자극이 가해져 참을 수 없는 분노 등으로 폭발되면 범죄로 이어진다고 볼 수 있다. 이번 부산 여아납치 살인사건의 범인인 김길태도 초등학교 시절까지는 얌전하고 공부도 잘 했지만 중고등학교인 사춘기에 접어들면서 자기가 부모로부터 버림을 당했다는 사실을 알고 엄청난 정신적 충격을 받아 공부도 인생도 포기한 채 부모에 대한 복수, 사회에 대한 복수심 등을 키워오지 않았을까 싶다. 또한 싸이코패스 같은 정신병질자 등은 특별한 범죄적 원인이 없이도 범죄를 야기할 수 있으므로 청소년기에 일제히 점검하여 대상자를 선정, 특별교육 등으로 순화시키는 방법 등을 정책적으로 연구하여 보아야 한다. 1) 맹자의 성선설과 순자의 성악설 2) 범죄심리학(김상균저 청목출판사78p) 3) 범죄심리학(김상균저 청목출판사 84p) 4) 범죄심리학(김상균저 청목출판사 103p) http://blog.daum.net/ws3139/13585325
정(定)가운데서 일어나는 선근(善根)의 모양에도
참된 것과 거짓이 있다
잘 분별해야 하고 잘못 취사해서는 아니된다.
만약 마정을 보고 선근이라 하여 마음에 취착하게 되면
이것은 사벽이므로 이로 인하여 병을 얻으면 발광한다.
만약 선근을 또한 마정이라하여 의심하게 되면 문득 좋은 이익을
잃어 버리게 된다
이 때에는 상(相)을 가지고 사(邪)인가 정(正)인가를 상험(相驗)하고
허인가 실인가를 법을 가지고 가려야 된다
무엇을 상험(相驗)이라하는가 하면 그것에는 대략
십쌍의 사상(邪相)이 있다
1. 촉체의 증과 감(觸體增減)
2.정과 난(定亂)
3.공과 유(空有)
4.명과 암(明闇)
5.우와 희(憂喜)
6.고와 락(苦樂)
7.선과 악(善惡)
8.우와 지(愚智)
9.박과 탈(縛脫)
10.강과 연을 말한다.
무릇 이 사법에는 지나치는 것 모자라는 것과 중이 있으므로
잘 살펴서 분별해야 한다
동촉(動觸)이 일어날 때는 몸과 손이 어지럽게 움직이며
혹은 올올(兀兀)하여 조는 것과 같으며 혹은 모든 다른 경지를 보게
되는데 이것을 증상(增相)이라 하고 혹은 촉이 발하여도
몸에 두루 미치지 못하며 문득 곧 괴멸해 버린다
이것으로 인하여 정의 경계를 잃어 버리고 소삭하고 무료하여
몸을 가눌 수 없는 것을 감상(減相)이라 한다.
혹은 몸과 마음이 정에 얽매여서 자재함을 얻지 못하거나
혹은 이것으로 인하여 정에 들어가서 칠일이 지나도 나올수
없는 것은 사정(邪定)의 모양이며
혹은 마음과 뜻이 요란하여 반연해서 머므르지 못하는 것은 난상이 된다
혹은 전혀 몸을 보지 못하고 공정(空定)을 증험했다하는 것은
공상이 되고
혹은 신체가 목석과 같이 굳어지는 것은 유상(有相)이 된다
혹은 밖의 갖가지 광명과 색상을 보는 것은 명상이 되고
혹은 신심이 어두어서 암실에 들어간 것과 같은 것은 암상이 된다
혹은 그 마음이 뜨겁고 고달프며 초최하고
즐겁지 않은 것은 우상이 되고
혹은 마음에 크게 경하스럽고 즐거우며 마음이 용맹스럽게
움직여서 편안스럽지 못한 것은 희상이 된다
혹은 몸과 마음이 곳곳이 아프고 고달픈 것은 고상이되고
혹은 몸과 마음이 쾌락하여 면면히 탐착하는 것은 낙상이 된다.
혹은 부끄러움없이 악한 마음이 생겨서 삼매를 파괴하는 것은
악상이 되고 혹은 밖에 산선(散善)을 염하여 각관(覺觀)이
마음을 움직여서 삼매를 파괴하는 것은 선상(善相)이 된다.
혹은 심식이 어리석고 미혹하여 혼미하고 전도하여
삼매를 파괴하는 것은 우상이 되고
혹은 지견이 상쾌하고 날카로와서 마음에 요사스러운 깨달음이
생겨서 삼매를 파괴하는 것은 지상(智相)이 된다.
혹은 오개(五蓋)와 번뇌가 심식(心識)을 가리워서
자유를 얻지 못하게 하는 것은 박상(縛相)이 되고
혹은 스스로 공무상정(空無相定)을 증득하여 이미 도과를 얻고
결사(結使)를 끊고 해탈하였다하여 증상만(增上慢) 이 생긴 것은
탈상(脫相)이 된다.
혹은 그 마음이 강하고 굳세어서 들어가고 나가는데
자재함을 얻지 못한 것이 마치 기왓장이나 돌과 같아 회변(廻變)하기
어려워 선도(善道)를 순종하지 않는 것은 강상(强相)이 되고
혹은 심지가 연약하기가 진흙과 같아서 쉽게 파괴되는 것은 연상이다
이 스무가지의 악촉(惡觸)은 정의 마음을 요란하고
선정을 파괴하여 마음이 사벽되게 하는 것은 사정(邪定)의 발상이다
만약 능히 사위를 분변하지 못하고 마음에 애착이 생기면
흔히 실심하게 되고 심지어는 미치광이가 되어
울고 웃고 분주(奔走)하여 심하면 죽거나 명을 상하게 한다.
만약 각촉(覺觸)이 발하게 되면 곧 방편으로 제거해야 된다.
행자가 이러한 것을 잘 살펴서 취착(取着)하지 아니하면
그 법이 곧 스스로 물러갈 것이다
또한 스므가지 사촉(邪觸)이 발할 때에 만약 구십육종의
외도와 귀신의 법가운데 서로 감응되게 되면
귀신이 염함을 따라서 와 붙는다
그리하여 귀신의 법문을 증하고 귀신의 세력으로
혹은 심정을 얻으며 혹은 지혜를 얻고 변재를 얻어서
길흉을 알아서 신이함이 많다
사화(邪化)를 널리 행하고 중생을 감동시킨다
혹은 비록 선함이 있더라도 그 행하는 것이 위잡하지마는
세인은 지혜롭지 못하여 그 기이한 것을 보고 이것을 현성이라하여
그가 하는 일을 믿고 복종하며 흔히 정계를 깨뜨리고 정견을 파괴한다.
귀력 때문에 듣는이가 믿고 따르지 아니할 수 없고
보는 사람은 모두 애경이 생긴다
비록 그의 몸에는 승의를 입었고 입은 불법을 말하지만
그 마음은 이미 요사하고 그 행은 이미 위벽하다
이것은 마귀의 권속이지 불의 정법이 아니다
행자가 이러한 것을 잘 살펴서 취착(取着)하지 아니하면
그 법이 곧 스스로 물러갈 것이다
ㅡ 선의 비밀 선문출판
인간의 자유의지: 자유의지와 결정론/ 자유와 인과의 양립 가능성/ 자아와 책임
http://www.sunoo.me/index.php?mid=nonsul_reading&page=2&document_srl=20769
[ 인간에게 자유 의지가 있는가? ]
1. 자유 의지와 결정론
인간에게 과연 자유의지가 있는지의 문제를 철학사에서 가장 오래 된 쟁점의 하나이다. 이 문제는 여러 가지 형태로 제기될 수 있는데, 가장 대표적인 것을 두 가지로 요약할 수 있다. 하나는, 신이 인간을 창조했다는 것을 전제로 하는 종교적 논쟁이며, 다른 하나는, 모든 사물에는 반드시 원인이 있다는 것을 전제로 하는 형이상학적 논쟁이다. 어떠한 경우이든, 이 문제는 우주에서 차지하는 인간의 위치를 규명하고, 다른 존재들과의 관계를 통해 인간의 본질을 밝혀낸다는 점에서 큰 의미를 가지고 있다.
먼저, 종교적 논쟁을 살펴보기로 한다. 앞에서 지적한 바와 같이, 우리가 신을 전지하고 전능한 존재로 이해한다면, 그리하여 그가 만물을 창조하였고, 이것을 원하는 대로 변화시킬 수 있으며, 또 어떻게 변화할지도 모두 알고 있다면, 이러한 상황에서도 우리는 여전히 자유 의지가 있다고 말할 수 있을까? 만약 있다면 그 근거는 무엇이며, 없다면 어떻게 해서 우리는 스스로 자유 의지가 있다고 믿고 있는 것일까? 과연 신과 인간과의 관계는 무엇인가? 이러한 문제들이 종교적 입장에서 보는 자유 의지와 결정론의 쟁점이다.
미국의 캘빈주의(Calvinism) 철학자 에드워어즈(Edwards, Jonathan)가 지적한 바와 같이, 모든 것이 신에 의하여 결정되어 있다면, 인간이 누리는 자유는 한낱 환상에 지나지 않게 된다. 물론, 우리는 무엇을 선택할 때에 자유롭게 한다고 느낄지 모르나, 어떤 것을 선택하든 그것을 선택하도록 이미 신에 의해서 결정되어 있어서, 실제로는 신의 의사를 수동적으로 따르고 있을 뿐이라는 것이다. 심지어는 어떤 것을 선택할지를 망설이고 있을 때에도 마찬가지다. 그렇게 망설이다가 어떤 것을 선택하도록 결국은 모든 것이 다 결정되어 있기 때문이다.
이처럼 모든 것이 신에 의해서 모두 결정되어 있고, 또 어떻게 결정되어 있는지를 모두 신이 알고 있다면, 우리가 망설이고, 무엇을 선택하며, 또 그 선택에 대해서 책임을 진다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 신이 존재한다면, 인생에 의미가 있을 수 있겠는가? 우리 자신이 우리의 행위에 대하여 궁극적인 원인이 될 수 없다면, 어떻게 책임을 지며, 책임질 필요가 없는 삶에 무슨 의미가 있는가? 만약 신이 존재한다면, 우리는 피노키오처럼 모두 꼭두각시들이 아닌가?
이러한 질문들은 쉽게 해결될 문제가 아니다. 종교적인 차원에서는, 신이 우리에게 자유 의지를 주었기 때문에 궁극적인 책임을 우리 스스로 져야 하며, 구원의 문제도 우리 자신의 문제라고 믿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믿음은 신앙의 문제이지, 철학적 논의를 통해서 합리적으로 얻은 결론은 아니다. 따라서, 신이 인간을 창조했다는 것을 전제로 하는 종교적 차원에서 볼 때, 자유 의지와 결정론의 논쟁은 신앙의 문제라고 볼 수밖에 없을 것이다.
한편, 형이상학적 관점에서 보면, 이 문제는 자유 의지와 인과론 및 책임이라는 세 개념과의 관계로 나타난다. 여기서 특히 유의할 것은, "모든 현상에는 반드시 원인이 있다."는 인과론을 어떻게 보며, 이것이 진리일지라도 우리는 여전히 자유 의지를 가지고 있으며, 따라서 우리의 행위에 대해서 책임을 질 수 있는지를 묻는다는 점이다. 말하자면, 종교적 차원의 쟁점에서 신이 차지하고 있던 자리에 인과율(因果律)을 대치시킨 것이 중요한 차이점이다. 문제는, 모든 현상이 인과율에 의해서 결정되어 있다는 진리와 우리에게 자유 의지가 있다는 진리가 어떻게 양립될 수 있는지의 여부에 있다.
이 논쟁에는 대체로 다음 세 가지의 입장이 있다. 첫째는, 우리가 무엇을 선택할 때에 스스로 자유를 느끼고 있다는 사실을 아무도 부정할 수 없으므로 결정론이 틀릴 수밖에 없다는 자유 의지론(自由意志論), 둘째는, 모든 현상은 인과율에 의해 결정되어 있으므로 내가 때때로 자유롭다고 느끼는 것은 환상에 불과하다는 결정론(決定論), 셋째는, 자유 의지론이나 결정론이 동시에 진리로 양립될 수 있다는 이른바 양립론(兩立論) 등이 그것이다. 이제, 이 세 가지 입장을 좀더 자세히 살펴보자.
자유 의지론에 의하면, 우리가 무엇을 선택하기 전에 망설이거나 자유로움을 느낀다는 사실은 도저히 부정할 수 없는 진리이다. 그것은 직관(直觀)에 의해서 느낄 수 있는, 증명이 필요 없을 정도로 분명한 사실이라는 것이다. 예를 들어, 내가 세뱃돈으로 천원을 받았는데, 그것을 어디에 쓸까 망설이는 사실을 어떻게 부인할 수 있으며, 그것으로 공책을 한 권 샀을 때에 나의 자유 의지대로 했다는 것을 어떻게 부정할 수 있을 것인가?
또, 일상생활에서 우리는 자기 자신의 행위에 대하여 스스로 책임을 지며, 잘못한 행위에 대해서는 꾸짖거나 벌을 주기도 하고, 잘한 일에 대해서는 칭찬을 하거나 상을 주기도 한다. 이 모든 행위는 우리가 다른 사람에 의해서 강요받지 않고 각자의 자유 의지대로 했을 때에만 의미가 있다. 우리의 일상생활에서 각자가 한 일에 책임을 지고 칭찬이나 비난, 또는 상벌에 의미를 부여하는 것은 분명히 우리에게 자유 의지가 있다는 증거가 아닐까?
대체로 위와 같은 주장이 자유 의지론자들의 공통된 입장이다.
한편, 결정론자들은 자연의 모든 현상뿐만 아니라, 인간의 행동 및 심리 상태까지 먼저 일어난 현상들에 의해서 완전히 결정되어 있다고 믿는다. 따라서, 내가 세뱃돈으로 무엇을 살지 망설이는 것도 이미 그렇게 하도록 결정되어 있으며, 그것으로 공책을 샀을 때에도 그렇게 할 수밖에 없도록 인과적으로 결정되어 있었다는 것이다.
특히, 결정론자들은 원인이 없이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는 사실을 철저하게 믿는다. 예를 들어, 사과가 떨어질 때에는 사과의 질량과 중력이라는 원인이 있으며, 태양이 떠오를 때에는 지구의 자전이라는 원인이 있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화를 내는 것은 친구가 약속을 지키지 않았다든지, 잘못한 일도 없는데 야단을 맞았다든지 하는 원인이 있다. 이 때, 화를 내지 않으면 얼른 보기에 원인이 없거나 특정한 원인에 당연한 결과가 생기지 않은 것처럼 보이나, 여기에도 반드시 원인이 있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친구가 약속을 지키지 않아도 그에게 무슨 사정이 있었을 것이라는 확신이 섰기 때문에 화를 내지 않은 경우이다.
이처럼 인간의 심리 상태를 포함한 모든 현상에 원인이 있다면, 이 모든 현상은 그 원인 때문에 반드시 일어날 수밖에 없는 필연적인 결과이다. 다시 말해서, 내가 남을 도왔다든지 거짓말을 했다든지 하는 것은 모두 나의 성격 탓인데, 나의 성격은 결국 내가 물려받은 유전 인자와 내가 자라 온 환경에 의해서 형성된 것이다. 그리고, 나의 유전 인자와 환경은 인과적으로 나의 의지와는 아무 상관없이 결정되어 있으므로 나의 성격도 결정되어 있다. 따라서, 자유 의지가 개입될 여지는 아무데도 없다는 것이 결정론의 입장이다.
위에서 살펴본 자와 같이, 자유 의지론자들은 결정론을 거부할 수밖에 없다. 결정론자는 우리의 의지를 포함한 모든 현상이 이미 결정되어 있어 자유롭지 못하다고 믿는 반면, 자유 의지론자들은 적어도 인간의 의지만은 인과율의 법칙에서 예외가 된다고 주장한다. 이 두 입장은 타협의 여지가 없는 것일까?
2. 자유와 인과의 양립 가능성
자유 의지론과 결정론이 모두 진리이면서 서로 양립될 수 있는지의 여부는 오랫동안 철학자들의 관심거리였다. 우리가 직접 경험하는 심리 상태를 부정할 수 없고, 더구나 자기의 행위를 규정하는 사회적 규범을 도저히 무시할 수 없으므로, 자유 의지론은 타당한 것으로 인정되어야 하는 이론이 아닐 수 없다.
한편, 많은 경험을 쌓으면 쌓을수록 어떠한 현상에도 반드시 원인이 있다는 것이 확고한 사실로 입증되고 있어서, 결정론이 진리라는 심증(心證)은 점점 굳어지고 있다. 게다가, 이 결정론은 현대를 풍미하는 여러 가지 형태의 과학들이 모두 전제로 받아들이고 있는 실정이어서 그 진리성을 조금도 양보할 수 없는 입장에 있다. 이 두 이론이 서로 모순됨이 없이 모두 진리가 될 수 있는 방법이 있을 것인가?
지금까지 소개된 양립론은 대체로 두 가지의 유형으로 나뉜다고 볼 수 있다. 그 하나는, 자유 의지론의 입장에 서서 존재의 세계를 둘로 구분하여 결정론이 진리일 수 있는 가능성을 보이는 입장이고, 다른 하나는, 결정론의 입장에 서서 "자유"라는 말의 뜻을 명확히 규명함으로써 자유 의지에 의미를 부여하려는 입장이다. 이제, 이 두 입장을 간단히 살펴보자.
첫째 번 유형의 가장 대표적인 철학자는 데카르트와 칸트이다. 데카르트는, 앞에서 지적한 바와 같이, 정신과 물질이라는 2개의 실체를 설정하여 서로 관계가 전혀 없는 것으로 여겼다. 정신은 생각하는 기능을 하는 반면에, 물질은 공간에서 기계적으로 운동하는 특징을 지녔다. 그리고, 정신으로서의 자아(自我)가 생각하거나 결정을 할 때에는 완전히 자유 의지대로 움직이지만, 물질로서의 육체가 움직일 때에는 전적으로 인과율에 의해서 움직인다. 이와 같이, 존재의 세계를 물질과 정신이라는 2개의 실체로 나누고, 결정론은 물질이나 동물의 세계에서만 적용될 수 있다고 주장한 것이다.
또, 칸트는 이러한 입장을 더욱 발전시켜서 세계를 자연의 법칙, 즉 인과율이 지배하는 현상(現像)의 세계와 인과율이 적용되지 않는 미지의 영역이면서 현상의 근거가 되는 본체(本體)의 세계로 나누었다. 그에 의하면, 인간은 이 두 세계에 양다리를 걸치고 서 있다. 그리하여, 우리의 육체는 본능적 욕구가 명령하는 바에 따라 다른 동물과 마찬가지로 인과율에 따라 움직이지만, 우리의 의지는 본체의 세계 중에서 자유의 법칙, 즉 도덕률(道德律)이 지배하는 영역에 속해 있어서 자율적으로 움직인다. 이처럼 우리 의지는 자유이기 때문에, 자기의 의지대로 움직였으면 그 선택과 행위에 대해서 책임을 져야 한다는 것이 칸트의 견해였다.
그렇다면, 이렇게 존재의 세계를 둘로 나누어서 자유 의지론과 결정론의 양립을 시도하는 입장의 문제점은 무엇인가? 무엇보다도 가장 중요한 것은, 존재의 세계를 둘로 나누는 근거가 무엇이며, 그 두 세계의 관계가 어떤 것인지를 확연하게 설명할 수 없다는 점에 있을 것이다. 데카르트는 정신이라는 실체와 물질이라는 실체를 분명히 구분함으로써, 예컨대 무슨 일로 내가 화를 냈을 때, 왜 눈이 커지고 심장이 빨리 뛰며, 주먹을 불끈 쥐게 되는가를 설명할 수가 없었다. 자유 의지는 정신의 영역에 있고, 육체는 인과율의 지배를 받아야 한다면, 나의 정신 상태가 어찌하여 내 육신의 움직임과 이토록 밀접한 관계를 가지게 되는가 그는 체계적으로 해명할 도리가 없었던 것이다.
칸트의 경우에도 현상과 본체를 뚜렷이 구분하지만, 본체가 과연 무엇인가를 분명히 밝히지 못하고 있다. 그는 그러한 세계가 있다는 것이 확실하다고만 할 뿐, 구체적으로 그 내용을 서술하지 못하였다. 그것은 우리의 이성으로 파악할 수 없는 미지의 세계로 남아 있는 셈이다.
한편, 결정론자이면서 "자유"에 의미를 부여하려는 입장은 어떠한가? 이 입장을 지지하는 철학자들 중에서 대표적인 사람은 흄과 밀(Mill, John Stuart)이다. 이들에 의하면, 엄밀하게 말해서 자유 의지론과 결정론을 양립시키는 문제는 진정한 문제가 아니라는 것이다. 왜냐 하면, "자유"라는 말의 뜻을 분명히 이해하면, 그것이 결정론과 양립되지 못할 아무런 이유가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것은 "자유"라는 용어가 여러 가지로 모호하게 쓰임으로써 생긴 문제에 불과하므로 진정한 문제가 아니라는 것이다.
이 결정론자들에 의하면, 우리가 "자유롭다"고 할 때에는 다른 사람에 의해 강요되지 않았다는 뜻이다. 다시 말해서, 내가 원하는 대로 할 때에 나는 자유롭다는 것이다. 따라서, 자유의 반대는 강제나 억압이지, 인과율에 의한 결정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러나, 많은 철학자들이 자유를 비결정론과 혼동하고, 우리의 행동에 아무런 원인이 없어야 비로소 우리는 자유로울 수 있다고 믿는데, 이것이 바로 "자유"라는 말을 혼동한 경우라고 그들은 지적한다.
이들 결정론적 입장에 서 있는 양립론자들은, 물론 결정론이 진리라고 생각한다. 따라서, 그들은 물리적인 현상뿐만 아니라, 정신적인 현상까지도 모두 인과적으로 결정되어 있다고 믿는다. 그러나, 이러한 사실은 자연의 법칙에 관한 문제여서, 자연의 현상을 객관적으로 서술할 뿐이지, 자유스러움과 같은 인간의 주관적 느낌과는 아무 상관이 없다고 말한다. 따라서, 인간을 포함한 온 우주가 인과적으로 결정되어 있다고 하더라도, 내가 자유롭게 느끼는 감정은 얼마든지 의미를 지닐 수 있다는 것이다.
위에서, 자유 의지론과 결정론의 입장이 무엇인지를 간단히 살펴보았다. 그리고, 그들이 각기 시도하는 양립론도 어느 정도 검토해 보았다. 자유 의지론자들은 결정론을 전적으로 부정하지는 않으나, 그것은 오직 자연의 현상에만 적용된다는 점을 강조한다. 그러나, 결정론자들은 자연의 현상에서와 마찬가지로 인간의 심성이나 도덕의 세계에서도 결정론이 적용된다고 주장한다. 다만, "자유"라는 말이 어떤 뜻인지를 명확히 규명함으로써, 그들은 결정론이 보편적으로 적용된다고 하더라도 "자유"가 의미를 지닐 수 있는 가능성을 찾으려고 한다. 그러나, 이러한 타협안은 자기들의 입장을 조금도 양보하지 않고 이루어진 것임을 알 수 있다.
3. 자아와 책임
자유 의지론자와 결정론자들의 대립은 근본적으로 자기 자신과 세계를 보는 눈이 서로 다르기 때문에 생겨난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자유 의지론자들은 자연 현상 외에 자유 의지의 내면적 세계를 별도로 설정한다. 그리고, 이 세계에서 자아는 모든 것의 중심이 되고 세계를 바라보는 관점을 제공한다. 한편, 결정론자들은 존재의 세계를 둘로 나누기를 거부하며, 모두 인과율이 적용된다는 점에서 단 하나의 세계가 있을 뿐이라고 주장한다. 따라서, 자아도 세계의 밖에서 세계를 바라보는 초월적 존재가 아니라, 세계 속에서 세계를 구성하고 있는 하나의 현상에 지나지 않는다. 이와 같이, 자유 의지론과 결정론의 논쟁은 좀더 심각한 형이상학적 쟁점에 바탕을 두고 있다. 이제, 이 점을 염두에 두고 이 문제를 좀더 자세히 살펴보자.
지금까지 논의해 온 것을 근거로 하여 자유 의지의 문제를 다시 정리하면 다음과 같이 요약될 수 있다.
우리는 경험을 통해 무엇에 대해서 망설이거나 결정을 할 때에 자유 의지가 있다는 것을 부정할 도리가 없다. 그러나, 우리의 자유 의지도 인과율에 의해 이미 결정되어 있거나 인과율이 적용되지 않는 자유 의지의 세계가 별도로 있어야 한다면, 자유 의지론이나 결정론 중에 하나는 틀리는 이론임이 분명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둘 중에서 그 어느 것도 포기할 수 없는 입장에 있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안고 있는 문제이다.
또, 일상생활에서 누구나 받아들이고 있는 책임이라는 현상과 결부시켜서 생각하면, 우리는 이 문제를 다음과 같이 정리해 볼 수 있다.
우리는 날마다 여러 가지 일에 대해서 골똘히 생각하고 망설이기도 하며, 마침내 어떤 것을 선택하거나 결정한다. 이러한 과정에서 아무런 제약이나 강요를 받지 않았다면, 반드시 나의 선택이나 결정에 대해서 책임을 져야 한다. 그러나, 결정론이 진리라면, 망설인다는 것은 무의미하고 선택의 결과에 대해서도 책임을 질 필요가 없다. 그것은 이미 결정되어 있으므로, 내가 그것을 원하든지 말든지 상관없이 필연적인 결과이기 때문이다.
여기서 우리는, 한 가지 매우 중요한 사실에 직면하게 된다. 자유 의지론과 결정론의 논쟁에서 가장 핵심적인 부분을 차지하는 것은 우리가 우리 자신을 스스로 어떻게 생각하느냐 하는 문제이다. 우리가 우리 자신을 능동적인 행위자로 보고 인과율의 흐름을 바꿀 수도 있는 존재로 생각한다면 우리는 자유 의지론자가 될 것이고, 우리를 인과율의 흐름에서 표류하는 한 잎의 낙엽 같은 것으로 보면 아무리 인간의 선택과 책임에 의미를 부여하려고 해도 결정론자가 될 것이다. 이제, 이들의 인간관 또는 자아관(自我觀)에 대하여 책임의 문제와 결부시켜 좀더 자세히 살펴보자.
자유 의지론을 포용하려는 결정론자들에 의하면, 앞서 지적한 바와 같이, 자유란 다른 사람으로부터 강요당하지 않는 심리 상태를 의미하며, 자아는 일종의 성격과 같은 것으로서, 환경과 유전 인자의 산물이다. 따라서, 어떤 종류의 성격을 가진 사람이 어떤 상황에서 외부로부터 억압을 받지 않고 무슨 결정을 내렸다면, 그 결정에 대해서 책임을 져야 한다는 것이 이들의 입장이다. 그리고, 이러한 과정이 모두 인과율에 의해서 결정되었다는 사실은, 우리가 우리 자신의 결정이나 행위에 대해서 책임을 져야 한다는 문제와는 아무 상관이 없다는 것이다.
이러한 입장에 대해서 자유 의지론자는, 우선 우리가 책임을 져야 하는 경우에 요구되는 자유는 결정론자들이 말하는 외부의 억압이나 강제로부터의 자유 정도가 아님을 강조한다. 예를 들어, 내가 집을 비운 동안에 도둑이 들어와서 재산을 훔쳐 갔을 때, 나에게는 아무런 책임도 없다고 말할 수 있겠는가? 자유 의지론자들에 의하면, 책임에 전제가 되는 자유는 이처럼 단순히 "행위의 자유"가 아니라 "의지의 자유"라고 말한다.
행위의 자유와 의지의 자유는 분명히 구별될 수 있다. 행위의 자유는 우리가 무슨 일을 결정하거나 선택한 다음 그것을 행동으로 옮길 때에 누리는 자유이지만, 의지의 자유는 우리가 무슨 일을 결정하거나 선택할 때, 다시 말해서 아직 행동으로 옮기기 전에 의지를 행사할 때에 누리는 자유이다. 전자는 몸가짐의 자유인 반면에, 후자는 마음가짐의 자유이다. 그리고, 이 마음가짐의 자유야말로 우리가 책임을 질 때에 요구되는 자유라는 것이 자유 의지론자들의 입장이다.
자유 의지론자들은 한 걸음 더 나아가, 의지의 자유를 누릴 때에 우리는 진정으로 자유롭다고 말한다. 예를 들어, 홍수가 밀려와서 둑을 무너뜨리고 가옥을 침수시켰을 때에만 우리가 불편을 느끼고 부자유를 경험하는 것이 아니다. 내부로부터 욕망이라는 이름의 홍수가 밀려 와서 의지의 둑을 무너뜨리고 자아라는 가옥을 침수시켰을 때에도, 이에 못지 않게 강한 부자유를 우리는 분명히 경험하고 있다. 여기서, 경험되는 의지의 자유가 과연 인과론적으로 결정되어 있는지를 따지는 것이 문제의 핵심이다.
자유 의지론자들에 의하면, 이 의지의 자유는 인과적으로 결정되어 있는 자기의 성격까지도 개조하거나 변경시킬 수 있을 때, 다시 말해서 인과의 흐름을 다른 곳으로 틀어 버릴 수도 있을 때에 진정으로 그 모습을 드러낸다고 말한다. 그것은 인과의 굴레를 벗어나는 자유이며, 이미 결정된 것이라도 바꿀 수 있는 능력이기 때문에, 이러한 자유를 인정하면 결정론과는 양립될 수가 없다. 그리고, 바로 여기서 자유 의지론자들의 자아관이 나타난다.
자유 의지론자들의 자아는 인과의 흐름을 막고 우뚝 선 정신적 실체이며, 윤리적 행위자이다. 예를 들어, 윤리적 갈등을 일으킬 때에 크게 확대되어 오는 자아, 가령 가장 친한 친구의 연인이 점점 좋아지기 시작할 때에 경험하는 갈등, 그리고 그 갈등의 소용돌이 속에서 점점 더 확실히 부각되는 나 자신, 이것이 바로 자유 의지론자들이 말하는 자아이며, 인과적으로 설명될 수 없는 자아인 동시에, 자기의 결정이나 행위에 대해서 책임을 져야하는 자아이다.
그러나, 결정론자들은 인과의 흐름을 딛고 일어서는 자아는 있을 수 없다고 주장한다. 물론, 우리는 우리의 성격을 모두 파헤쳐 볼 수는 없다. 따라서, 그것은 미지의 영역으로 남아 있고, 인과적으로 설명될 수 없는 그 무엇 또는 정신적인 실체라고 할 수도 있다. 그러나, 그것도 원칙적으로는 유전과 환경의 소산에 지나지 않으며, 결국 인과적 흐름의 한 부분 외에 아무것도 아니라고 볼 수 있다. 요컨대, 결정론자에게는 자아가 무엇으로 설명되든 간에, 한 가지 분명한 것은, 보편적인 인과의 굴레에서 벗어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이것은 심각한 쟁점이 아닐 수 없다.
위에서 우리는 자유 의지론과 결정론의 논쟁을 검토해 보았다. 그것은 종교적 차원에서 고찰해 볼 수도 있고, 형이상학적 차원에서 검토해 볼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 어느 경우이든지, 이 문제는 합리적인 해결점을 찾지 못한 채 계속되는 쟁점으로 남아 있다. 가령, 종교적인 차원에서는 신의 존재 자체를 문제로 삼는 지경에까지 확대되고, 결국은 개인적 신앙의 영역 안으로 귀결된다. 한편, 형이상학적 차원에서는 세계와 자아를 보는 두 가지 상반된 입장의 대립으로 나타난다. 나는 누구인지의 문제가 먼저 검토되지 않으면 이 문제는 조금도 해결되지 못한 채로 남아 있게 마련이다. (소홍렬 외 철 학)
<생각해볼 문제>
문제1) 살인을 한 사람이 자기의 살인 행위에 대하여 책임을 지지 않겠다고 할 수 있는 경우와 이유로서 어떤 것이 있는지 생각해 보자. 변호사와 검사의 입장에서 이 문제를 논술해 보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