질병은 관계의 단절, 회복은 교감과 소통으로 현대인들은 질병의 대부분의 원인을 이제 생활 습관에서 찾고 있습니다. 오랜 생활 습관들이 병을 일으킨다는 것이지요. 그래서 음식과 운동, 스트레스에 관한 이야기들을 많이 합니다. 누구는 먹는 것 때문에, 누구는 운동량이 적어서, 누구는 스트레스를 받아서 병이 낫다고 이해 합니다. 일단 병이 난 다음에서야 원인을 찾으려 하는 것을 보면 어떤 세균에 감염되었는지, 어떤 바이러스에 걸렸는지 정확히 찾아내는데 어려움을 겪고 있는 현대 의학은 또 하나의 짐을 안게 된 셈입니다. 결과를 가지고 원인을 추정하거나 예측하는 정도이지, 아무도 그것 때문에 병이 낫다고 주장하지 못하고 있는 실정입니다. 세상에는 질병도 많고 그에 따른 각종 처방과 치료법도 많이 있습니다. 하지만 현대인들에게 가장 곤란한 것은 질병의 진단도, 상응하는 최고의 치료법도 만나기 어렵다는 것이죠... 질병을 제대로 파악할 수 없다면 치료법 또한 없다고 하는 것이 맞을 겁니다. 그렇다면 병은 왜 걸리는 것일까요? 병의 원인은 무엇일까요? 질병에 대해서는 질병은 생활 습관의 결과다~ 질병은 정화와 사랑의 시간이다~ 질병은 반성과 감사의 메시지다~ 라는 말을 해왔습니다. 참으로 여러분들에게는 낯선 이야기들로 들리실테고 이를 이해하는 데에는 많은 시간이 걸리실 수도 있을 겁니다. 나름 많은 시간과 돈과 노력을 들이고서 닥터 쇼핑과 치료법 헌팅들을 거치고 나서야 비로서 작은 앎이 시작된다고나 해야 할까요~ 기존의 패러다임이 무너지는데에는 사람도, 집단도, 사회도 많은 시간과 댓가가 필요한듯 보여집니다. 여러분들에게 진정으로 패러다임 쉬프트가 일어날 수 있다면 그건 정말 하늘의 선물일겁니다. 모든 것을 요약하고 정리할 수 있는 단 하나를 들어 설명하라면 질병은 관계의 단절이라 말하고 싶습니다. 질병은 관계의 단절, 회복은 소통과 교감으로~~~~~ 질병의 원인을 현대의학은 세균과 바이러스 때문이라고 했고 자연의학은 생활 습관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하지만 이 모두가 아니라니요~ 네~ 질병의 원인은 관계의 단절에서 비롯됩니다. 밥과 나의 관계, 몸과 나의 관계, 마음과 나의 관계, 사람과 나의 관계, 자연과 나의 관계, 하늘과 나의 관계 말입니다. 우리가 그 보이지 않는 그 관계의 끈을 놓쳐 버릴 때 우리 몸은 극도의 불안감에 쌓이게 됩니다. 관계의 단절, 분리된 느낌은 불안감을 낳고 그 불안감은 두려움과 공포심을 불러 옵니다. 그 두려움과 공포로부터 자신을 방어하기 위해 키워낸 감정들이 때론 분노로, 때론 자존감으로, 때론 허무감으로, 때론 피해의식으로 드러날 뿐입니다. 우린 그 분노와 자존심과 허무의식과 피해의식들이 병을 일으킨다고 하고 있지만 이 또한 모두 관계의 단절 속에 일어난 감정과 의식의 영역들입니다. 사람들은 이 태초의 분리감을 극복하기 위해 누군가와 함께 있길 원하고, 어딘가 소속되기를 원하고, 누군가에게 인정받고 싶어 합니다. 또 사람들은 자신의 자존감을 통해서 자신의 존재를 확인하기 위해 부정적인 에너지에 스스로 쌓여 있는 줄도 모르고 의지와 열정만을 불태웁니다. 또 사람들은 허무감과 피해의식에 사로잡혀 스스로를 방어하기 위해 자기만의 아성, 자기만 옳았다는 생각을 쉽게 버리려 하지 않습니다. 자신이 질병의 전조 상태에 있는 줄도 모르고 그것이 관계 맺음이 순조롭지 못했기 때문이라고는 더더욱 생각하지 못합니다. 음식과 관계를 잘 맺지 못하면 병이 납니다. 나의 밥이 되어 살이 되고 피가 되어준 음식에 감사하고 몸에 맞는 음식을, 제대로 된 음식을, 몸을 배려하는 방식으로 먹지 않는다면 음식 때문에 병이 납니다. 몸과 나의 관계를 잘 맺지 못하면 병이 납니다. 몸은 나를 오늘 여기에 살아가게 해주며 몸은 나의 의식과 성장을 위해 배우고 경험하게 해주는 영혼의 훈련장이기 때문입니다. 그 몸에 감사하고 그 몸을 배려하고 그 몸을 사랑하지 않는다면 우리의 삶은, 오늘의 공부와 영혼의 성장은 없기 때문입니다.
마음과 나의 관계를 잘 맺지 못해도 마찬가지입니다. 마음은 강력한 물질의 작용이라 보통의 의식작용으로는 마음을 통제하기 참으로 어렵습니다. 마음은 몸이라는 생명체를 잘 보존하기 위한 수단으로 설정된 감정의 영역에 국한되어 있어야 하지만 그것이 고정된 자아라는 에고의식으로 굳건히 자리 잡게 되면 이미 마음이 굳어진 만큼 몸의 유연성은 사라지고 병들기 시작하게 됩니다.
사람과 나의 관계를 잘 맺을 수 있어야 우리는 건강하고 행복합니다. 사람은 사람과 사람의 관계가 깨어질 때 극도의 스트레스를 받습니다. 그 의존된 관계, 연관된 관계를 떠나서 존재하는 생명은 없기 때문입니다. 니가 아프면 나도 아픈 것이고 니가 좋으면 나도 좋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가족과 연인과 이웃과 남편과 아내와 자녀와의 관계가 깨어지면 누구나 다 가장 큰 스트레스를 받고 그것은 질병으로 이어지곤 합니다. 그렇게 가까운 사람들과의 사랑의 관계는 삶의 안정감과 직결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자연과 나의 관계를 잘 맺어야 합니다. 자연이 아프면 우리의 삶이 아픕니다. 제대로 먹을 수 없고 제대로 숨 쉴 수 없고 제대로 움직일 수 없습니다. 자연이 주는 고마움을 잊은지 오래된 인류의 삶은 어느덧 부메랑이 되어 삶의 고통의 수치들을 높이고 있습니다.
하늘과 나의 관계를 잘 맺어야 합니다. 하늘없이 땅이 없었고 땅이 없이 인간의 삶이 없었습니다. 하늘과 땅과 함께 인간의 삶은 영속되었지만 인간의 영혼은 하늘에서 여기에 이르러 하늘사람이라 합니다. 하늘 사람이 스스로 제 고향을 잊었는데 어느 누가 마음 편하겠습니까.
소통이 화두가 된 세상.... 그만큼 관계의 회복과 재정립이 중요한 때임을 알려주고 있습니다. 관계의 회복과 재 정립을 통해 원활히 소통할 수 없다면 그 자체가 살아 있다 할 수 없습니다. 관계의 단절은 삶의 괴로움과 고통으로, 두려움과 공포로 , 질병과 죽음으로 우리를, 우리가 사는 이 터전을 송두리째 몰고 가려고 덤벼 들게 될 것입니다.
관계의 회복을 위해 여러분들이 많은 노력을 해야 하는 것은 사실입니다. 그건 그만큼 그것의 중요함을 몰랐기 때문에 이제는 그 댓가를 우리가 지불해야 하는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돈을 써야 할 때, 마음을 써야 할 때, 노력을 써야 할 때, 시간을 써야 할 때... 사람에 따라, 상황에 따라 아낌없이 쓸 줄 알아야 하고 우리의 지혜로움은 달라져야 합니다. 하지만 그 모두가 진정으로 해야 합니다. 가벼운 마음과 섣부른 행동은 오히려 서로에게 의심만 되고 상처만 됩니다. 내 마음이 진실로 그러하다면 그 마음은 전달되고 그 상황은 원하는대로 되어 갑니다~
관계의 회복에는 자신의 이해 관계를 버려야 하는 엄청난 숙제가 매달려 있습니다. 그렇지 못하기 때문에 관계를 개선하고 회복하기 어렵게 느껴지는 겁니다. 자신을 버릴 수 없고 양보할 수 없고 손해 볼 수 없기 때문에 말입니다.
여러분들이 자신만을 위해서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하고 있다면 상대방은 척~ 보고 알것입니다. 엄마가 한이 맺혀 나를 공부시키고 있다는 것을 아이들이 아는 것처럼 말이죠. 엄마가 아이 아픈 것을 보고 울고 있을 때 자기 설움에 복받쳐 우는 것인지, 진정으로 자기를 위하고 있는지는 아이는 그냥~ 알게 됩니다. 우리는 그냥~ 척~ 보면 압니다.
척~ 보면 아는 신령스러움이 나에게 있다면 너에게도 있는 줄 알아야 합니다. 그래서 양심을 속일 수 없고 자신을 속일 수 없고 그래서 솔직해져야 합니다.
진정으로 관계를 회복하고 싶을 때 진정으로 나를 위하고 너를 위하는 방식이 그것이라 믿을 때 진정으로 너와의 소통이 나를 살리고 너를 살리는 것이라 믿을 때 진정으로 분명히 떠오르는 그 하나가 있어 그것만이 그와 교감하며 그와 소통할 수 있다 믿을 때 오늘의 모든 것을 감사할 줄 알고 자신의 모든 것을 버려도 아깝지 않다 생각했을 때 그 때 어떤 것이라고 하십시오~ 그 때는 이제 모든 것을 원하는대로 가져다 줄 때입니다. 그 때는 지금 이 순간이 더 이상 불행이나 슬픔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 때는 비로소 진정한 교감과 원활한 소통으로 완전한 회복의 길로 우리를 인도할 것입니다.
너의 모든 것을 나의 모든 것으로 느끼고 알 수 있을 때 그 교감과 그 소통과 그 하나됨의 기쁨은 여러분들을 온전하게 치유하고 여러분들의 삶을 온전하게 회복시켜 줄 것입니다. 오늘도 감사합니다. ()
------------------------------------------------------------------------------------------------------------------------------------------------------------------------ 조화로운 관계를 위하여 (로어 셰퍼드) - 식물과의 대화 오래 전 인디언에 관한 책을 읽어보면, 그들은 자연과 교감하며 살아가고 있었습니다. 약초 한 뿌리를 캐더라도 먼저 양해의 인사를 했었지요. 우리나라의 심마니들도 비슷한 예의를 갖추곤 한다고 합니다.식물과 대화를 할 수 있는 사람은 분명히 있다고 믿었는데, 최근에 그 대화자를 알게 되었습니다. 성함은 로어 셰퍼드라고 합니다. 이 곳에서 소개하고 싶습니다식물과의 대화 2010-08-22 로어 셰퍼드 조화로운 관계를 위하여
-저는 자연에 사랑을 보냅니다. 저는 너무나 아름답게 빨리 자라는 열무들을 보았어요.
고맙습니다. =그것은 당신을 위한 선물이었습니다
그 식물들은 그렇게 당신의 사랑을 느낄 수 있었고
그들은 당신을 위해 작은 선물을 열어 주었지요.
오늘처럼 그들과 계속 교감하시면 더욱더 많은 교감이 발전할 것입니다. 좋은 신호입니다.
오직 사랑만이 그 방법을 보여 줄 것입니다. 식물들과 함께 행복하세요. 쾌활하게 즐기세요.
그들은 계속적인 관심을 좋아하고 당신의 따뜻함을 느끼기 시작하고 있습니다.
-흙이 좋지 않아서 우리는 물에 젖은 짚을 덮어주어 거름을 주려고 합니다.
좋은 방법인지요?
=좋은 방법입니다. 계속 그렇게 하세요. 그 짚은 흙과 식물들에게 영양분을 주는 것을
도와 줄 수 있는 흙을 위해 좋은 거름이 될 수 있을 것 입니다.
흙은 식물들이 더 자라기 위해서 영양분이 필요합니다.
당신도 인간의 도움이 필요하고 영혼과 신의 도움이 필요하지요.
이것을 위하여 당신은 계속적인 따뜻함과 식물들에 대한 애정을 생산해야 합니다.
당신의 에너지의 빛이 그들의 에너지와 같게 될 것입니다.
다른 말로 말하면, 에너지의 빛들은 당신이 하는 것만큼 더 많이 더해지게 될 것입니다.
일단 이런 시너지(공동상승작용)가 발생하면 상상할 수 없는 결과들이 나타날 것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강력한 일치의 관계가 계속되는 것은 또한 노력을 해야 합니다.
당신은 하늘과 땅과 그리고 모든 물질적 정신적 요소들의 균형이 진정으로 만나는 정원을 보아야만 할 것입니다.
그것은 많은 물리적인 노력을 가하지 않고
더 많은 정신적인 노력의 제공과 영적인 따뜻함과 치료가 요구될 것입니다.
영의 세계는 마음의 세계입니다.
그래서 당신의 마음이 굳건하고 그리고 열려 있어야만 합니다.
당신은 할 수 있습니다!
- 저는 제가 식물들을 보았을 때 울고 싶다고 느꼈습니다. 왜 그런가요?
= 그것은 당연한 것입이다. 당신과 그들이 서로를 향해 열려가고 있는 것이지요.
서로에게 마음을 열고 연결되어 갈수록, 당신은 이미 그곳에 있던 사랑을 느낄 것입니다.
그것은 이미 당신의 마음 안에 있습니다. 어떤 일도 할 필요가 없습니다.
사랑이 우러나오도록 하면 됩니다. 항상 그 사랑을 느껴보십시오.
마음을 비우면 당신 앞에 펼쳐지고 있는 보이지 않는 이야기를 느낄 수 있습니다.
그렇게 많은 도움들이 날개를 펼치며 기다리고 있습니다.
보이지 않는 세계는 인간들에게 실망하고 있지만, 인간의 노력 역시 사랑하고 있습니다.
그것을 붙잡을 수 있다면 희망은 항상 있는 것입니다. 여기에 기회가 있습니다.
인간들을 위해, 지구를 위해 희망이 되어주십시오.
그들에게 보이지 않는 식물들의 세계와 대화하는 방법을 보여주십시오.
식물들은 느낄 수 있습니다. 그들은 소통하며 흐르고 있습니다.
사랑으로 그 흐름을 들여다보십시오.
--------------------------------------------------------------------- 어떤분께서 쪽지로 저에게 좋은말씀과 조언을 해주셨는데요. 제가 보낸 답글중에 게시판에 쓰고싶은 일부분 편집하여 올립니다. ============================================
쪽지를 보내주시고 생각을 전해주셔서 감사드립니다^^. 저는 제가 혼자만 특이하게 동물들이 저급한 존재가 아니라고 생각하는줄 알고 혼란스럽기도하고 아주조금은 조심스럽기도 했거든요.
제가 겪었던 절대다수의 사람들은 동물들을 언제든 죽여도되는 존재 저급한 더러운 멍청한 등등 좋지않는 수식어에 어울리는 존재라고 생각하는것을 느꼈고 그럴때마다 안타깝고 마음이 좋지 않았었습니다.
소외를 조장하고 끼리끼리만 누리려고하는 쓰레기같은 인간들이 드글드글한 세상인데 (일반대중부터 사회지배층까지 스케일만 틀리지 하는행태가 똑같습니다. 그렇지 않은 사람들도 일부 있지만요) 왜 인간들이 더 고차원의 존재인지 도무지 이해할수 없었는데 님의 말씀을 들으니 공감이 많이되면서 기분이 좋습니다.
님의 말씀처럼 실버루비는 저의 아프고 병든마음을 치유하기 위해 저와인연이 되었던 것일수도 있겠군요. 어찌보면 말도안되는 이야기 같지만 그것이 사실이라도 하여도 저는 전혀 이상하지 않습니다.
고등학교때 전학간후로 2년 동안이나 끔찍한 경험을 당했습니다. 건강도 안좋아진대다가 화목하지 않은 집안과 외모고민으로 언제나 우울한 상태로 있다보니 그나마 있는 친구들도 떠나더군요. 여린마음의 소년에게는 너무도 가혹한 시련 이었습니다. 그후로 약간의 피해망상증과 성격도 움츠러들고 대인기피증이 생기더군요. 지금은 거의없지만요.
한창 연애도하고 놀고 그럴시기에도 언제나 우울해있었습니다. 그때 실버루비를 만났고 행복했었죠.. 아마 그때 그애들을 못만났다면 죽었을수도 있었겠네요. 마음이 여리고 내면이 강하지 못했습니다. 물론 지금은 그때보다 더 강해졌지만 내면에 여린감성은 아직도 여전합니다.
제가 실버 루비에게 미안한것이 아주 많습니다. 말년에는 루비는 저와같이 지내긴했지만 제가 정신못차려서 신경 많이 써주지 못했고 실버도 보지못하고 혼자 쓸쓸히 보내다 갔습니다. 실버가 무척 보고싶었을 거에요... 실버또한 루비가 무척 보고싶었을겁니다. 제가 지금 천운이 닿아서 실버를 찾게된다해도 실버를 볼낯이 없습니다. 루비가 이미 죽어버렸거든요. 실버는 저를 보면 루비도 생각나서 보고싶은 감정이 되살아나 괴로울 것입니다.
그래도 실버가 무척 보고싶습니다. 어디있는줄만 알면 다버리고 당장 달려가고싶을 정도로요. 제가 타지에서 일하다 잠깐 집에내려가서 당시 (아버지후배분이 돌보고있어서) 실버루비를 보고 다음날 올라갔습니다. 나중에 들은 얘기인데 저 올라가자마자 그날밤에 실버가 집에 돌아와서 막 소리내서 울었답니다. 그러자 부모님이 개장에 가뒀고 다시 풀어줬는데 그뒤로 못봤다고 하더군요. 그때 당시 그상황을 알았다면 당장 내려가서 같이 살았을거에요.
동물도 생각이 있고 감정이 있습니다. 다만 인간보다 지능이 낮고 표현을 잘 못하는것 뿐입니다. 동물의 도덕심과 인간의 도덕심 어느존재가 더 높다고 생각하십니까? 동물은 동족을 살인하거나 이유없이 괴롭히거나 피해를 주지 않습니다. 가족이 아닌 사람과 사람의 돈독한 관계와 인간과 동물의 돈독한 관계 어떤것이 더 질기다고 생각하십니까? 동물에게 정을주면 그 동물은 절대 절대로 인간보다 먼저 배신하지 않습니다. 인간은 어떤가요?
더 알고 더 능력있고 더 선택권이 있는 인간이 덜가진 인간에게 베풀어야 하는데 그렇지 않고있죠. 가진자들 사회지도층들만 이기적인게 아닙니다. 더 알고 더 능력있고 더 선택권이 있는 우리들이 동물들을 어떻게 대하고 있나요? 모두다 똑같습니다. 타락한 인간들.. 모두가 그렇다는건 아닙니다.. 좋은 하루 되십시오~! --------------------------------------------------------------------------------------------------------------
베릭 |
베릭
- 2011.03.10
- 23:08:05
- (*.156.160.233)
자작나무 숲으로 가서
고 은
광혜원 이월마을에서 칠현산 기슭에 이르기 전에
그만 나는 영문 모를 드넓은 자작나무 분지로 접어들었다.
누군가가 가라고 내 등을 떠밀었는지 나는 뒤돌아보았다
아무도 없다 다만 눈발에 익숙한 먼 산에 대해서
아무런 상관도 없게 자작나무숲의 벗은 몸들이
이 세상을 정직하게 한다 그렇구나 겨울 나무들만이 타락을 모른다
슬픔에는 거짓이 없다 어지 삶으로 울지 않은 사람이 있겠느냐
오래 오래 우리나라 여자야말로 울음이었다 스스로 달래어온 울음이었다
자작나무는 저희들끼리건만 찾아든 나까지 하나가 된다
누구나 다 여기 오지 못해도 여기에 온 것이나 다름없이
자작나무는 오지 못한 사람 하나하나와도 함께인 양 아름답다
나는 나무와 나뭇가지와 깊은 하늘 속의 우듬지의 떨림을 보며
나 자신에게도 세상에도 우쭐해서 나무짐 지게 무겁게 지고 싶었다
아니 이런 추운 곳의 적막으로 태어나는 눈엽이나
삼거리 술집의 삶은 고기처럼 순하고 싶었다
너무나 교조적인 삶이었으므로 미풍에 대해서도 사나웠으므로
얼마만이냐 이런 곳이야말로 우리에게 십여년 만에 강렬한 곳이다
강렬한 이 경건성! 이것은 나 한사람에게가 아니라
온 세상을 향해 말하는 것을 내 벅찬 가슴은 벌써 알고 있다
사람들도 자기가 모든 낱낱 중의 하나임을 깨달을 때가 온다
나는 어린 시절에 이미 늙어버렸다 여기 와서 나는 또 태어나야 한다
그래서 이제 나는 자작나무의 천부적인 겨울과 함께
깨물엉먹고 싶은 어여쁨에 들떠 남의 어린 외동으로 자라난다
나는 광혜원으로 내려가는 길을 등지고 삭풍의 칠현산 험한 길로 서슴없이
지향했다
1984. {조국의 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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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품 해설
제 1 연 : 충청북도 진천군 이월면에 있는 광혜원 이월마을에서 칠현산(경기도 안성군과의 경계에 있는 산) 기슭에 이르기 전에, '나'(시적 화자)는 전혀 예상치 않게 드넓은 자작나무의 숲이 있는 분지에 접어들었다.
누군가가 그 숲 속으로 들어가라고 내 등을 떠밀었는지 싶어 뒤돌아보았지만, 아무도 없다.
다만 눈이 내려 덮인 먼 산을 향하여 서 있는, 그러나 그 산과는 아무런 상관도 없이 겨울이 되어 앙상한 가지만을 남긴 채 서 있는 자작나무 숲의 벗은 몸들이 '나'로 하여금 이 세상을 정직하게 바라보게 한다. 타락하고 혼탁한 세상과 무관하게, 겨울의 나무들만이 의연히 벗은 채로 서 있는 것이다.
제 2 연 : 대체로 사람들의 슬픈 마음에는 거짓이 깃들지 않는다.
적어도 슬픈 그 순간에는 누구나 순결해진다는 것이다. 삶으로 인해 울지 않은 사람은 아무도 없다.
누구에게나 삶의 무게로 인한 고통이 뒤따르기 마련이다.
그 가운데서도 우리 나라 여자들의 삶 또는 운명은 울음이었다.
오랜 역사를 거쳐오는 동안 우리 나라 여자들은 기다림이나 그리움, 순종과 부덕 따위로 울음(눈물)의 운명을 지닌 존재로 간주되어 왔다.
그 울음조차 '스스로 달래어 온 울음이었다'. 즉 인고(忍苦)를 동반하는 여성적 정한(情恨)의 표출인 것이다.
여기서 울음은 슬픔에서 오고 슬픔은 거짓없음과 통하며, 그것은 다시 타락을 모르고 정직하게 사는 나무(자작나무)와 이어져 있다.
그런데 그 숲에는 자작나무들끼리만 있건만, 숲을 찾아든 '나'까지도 하나가 되게 한다. 뿐만 아니라 자작나무는 '누구나 다 여기 오지 못해도 여기도 온 것이나 다음없이', '오지 못한 사람'들까지도 함께 있는 양 느끼게 만든다. 그것은 아름다움이다.
제 3 연 : 나무의 떨림, 나뭇가지의 떨림, 나무를 올려다보면 하늘이 비치고 그 하늘을 향해 뻗어 있는 우듬지(나무의 끝줄기)의 떨림을 본다.
그 떨림을 보면서 나 자신을 향해서도 세상을 향해서도 우쭐해져서 '나뭇짐 지게 무겁게 지고 싶어'진다.
이 말은 무언가 의미 있는 일을 하고 싶어진다는 뜻이다. 아니 오히려 '이런 추운 곳의 적막으로 태어나는 눈엽(어린 잎)이나/ 삼거리 술집의 삶은 고기처럼 순하고 싶어'진다.
왜냐 하면 그 동안 '나'의 삶이 너무나 교조적이었고, 미풍(微風, 세상의 작은 움직임)에 대해서도 사나운 마음으로 대했기 때문이다.
제 4 연 : 자작나무 숲이 있는 이런 곳은 우리의 삶에 대하여 아주 강렬한 느낌을 안겨 준다.
그것은 바로 '경건성'이며, 이 같은 감정은 정말 오래 만에, 거의 십여 년만에 느껴 보는 것이다.
'나'는 그 느낌이 '나' 하나만이 아니라 온 세상을 향해 있는 것임을 깨닫고 있는데, 그로 인해 '나'의 가슴이 벌써 벅차오른다.
그리하여 다음과 같은 아포리즘(aphorism)을 얻게 된다.
"사람들도 자기가 모든 낱낱 중의 하나임을 깨달을 때가 온다."
이것은 주체로서의 자기 존재(또는 주체성)에 대한 인식적 각성을 뜻하는데, 이는 단지 '자기'에게서만 그치는 것이 아니라 '자기'와 '타자'와의 관계 속에서 존재를 인식한다는 말이다.
그리고 이같이 삶의 경건성에 대한 통찰에 이르게 되자, 시적 화자는 '나는 어린 시절에 이미 늙어버렸음'을 깨닫게 된다.
그만큼 세상을 일찍 알아차려서 겉늙어버렸다는 뜻인데, 따라서 '여기 와서 나는 또 태어나야 한다'고 시인은 말한다.
이제 '나'는 다시 태어나서 '어여쁨에 들떠 남의 어린 외동으로 자라난다'.
여기서 다시 태어난다고 함은 이른바 '제 2의 탄생', 즉 삶에 대한 참다운 깨달음에서 오는 새로운 인생의 출발을 의미한다.
또 '남의 외동으로 자라난다'고 함은 고귀하고 경건하게 세상을 살아간다는 것을 뜻한다.
제 5 연 : '나'는 광혜원으로 내려가는 편한 길을 등지고 삭품이 불어 대는 칠현산으로 향하는 험한 길로 서슴없이 발길을 향했다.
'험한 길로의 지향'은 삶에 대한 새로운 인식 위에서 가능한 것이고, '나' 자신의 새로운 출발, 인생의 새로운 도약을 의미한다.
이 시는 삶에 대한 깊은 통찰을 바탕으로 하여 삶의 경건성과 새로운 도약을 말하고 있다.
시적 화자는
자작나무 숲 속에 들어와 그 나무들을 통하여 타락하지 않음, 곧 정직함을 깨닫는다(제1연).
그리고 자신과 자연, 세상 전체가 일체되는 것을 느낀다(제2연).
이어서 자아를 반성하고(제3연),
마침내 삶의 견건성을 발견한다(제4연).
그리하여 '험한 길'로 지향하는 새로운 출발(제5연)을 스스로에게 다짐한다.
제3연에서 나무의 '떨림'은 생명의 미세한 움직임을 통하여 삶의 고운 결을 암시한다.
이는 시인의 인간주의적인 정신으로 이어지는데, 가령 '추운 곳의 적막으로 태어나는 눈엽이나/ 삼거리 술집의 삶은 고기처럼 순하고 싶었다'는 부분에서와 같이 삶에 대한 부드럽고 넉넉한 태도로 나타나 있다.
그런데 시인은 왜 '우쭐해'질까? 여기서의 '우쭐함'은 결코 교만함이 아니다.
나무의 가는 '떨림'을 보고서 삶의 진리를 깨달은 자의 자기 충족감에서 오는 '우쭐함'인 것이다. 즉 스스로에게 어떤 대견스러움을 느낀 것이다.
시인은 거기서 생명의 충만 속에 깃들인 삶의 경건함을 본 것이고, 그래서 '순'해지고 싶다는 자기 반성에 도달할 수 있게 된다.
이러한 자아 성찰은 자연과의 합일(제2연)에 도달했을 때만이 온전히 달성되는 것이다.
그리하여 시인은 이 시의 핵심 구절인 '삶의 강렬한 경건성'에 대한 통찰을 얻게 되고, '서슴없이' '험한 길로' 자신의 삶의 방향을 잡게 된다.
시인은 우연히 자작나무 숲에 와서 자연과의 교감을 통해 '또 태어'났으며---다시 말해 새로이 인생의 진리를 터득하였으며, 그것으로써 더욱 풍부해지고 유연해진 자세로 삶의 시련과 고난에 대처해 가고자 하는 것이다.
이는 1980년 신군부에 의해 죽음의 직전에까지 이르렀던 시인 자신에 대한 새로운 다짐이라고 읽을 수 있겠다.
즉 '삶의 경건성'에 대한 각성을 새로이 함으로써 참된 인간화 및 사회 민주화에 대하여 자신을 다시금 도약시키고자 하는 의지를 보여 주는 작품이다.
● 삶의 경건성에 대한 새로운 깨달음
네라
- 2011.03.10
- 23:27:00
- (*.34.108.119)
우주가 온통 마귀들만 살고 있고, 자기를 해하려는 악만이 존재한다는것, 사방을 어둠으로 보는 것은 그 자신의 투영이며, 그것은 자기 자신과 그 삶을 먼저 사랑하지 못하고 그렇게 보기 때문입니다...우주 궁극의 최고의 경지나 근원자외엔 우주가 온통 주체가 없는 꿈이요 타락한 어둠의 세계라는게 가능합니까? 그러면 오로지 근원자 혼자 존재하면 돼지 왜 낭비스럽게 우주가 존재하겠습니까....이것은 균형을 잃으것이며, 그것은 상식에 반하는 것이며, 논리와 인지상정의 섭리상 그렇게 될수 없습니다.....그것은 스스로를 분리시키고, 가두는 것입니다....어둠은 다른 말로 '공포'입니다...공포는 사랑을 가로막고 영혼을 위축시킵니다.
좋은 글 감사합니다. 고야옹님의 아름답고 깊은 마음됨됨이가 충분히 드러나는 글이었습니다.
개와 고양이 돌고래등은 지능이 높고 감정이 뛰어납니다. 자페증아이들을 치유하는 데에 훈련된 개들이 큰 도움이 된다고 합니다. 서양에서는 돌고래들을 통해서 자페아들을 치유하는 교육장이 있다고도 합니다. 보통 일반적인 사람들은 변덕이 심하고 감정기복을 예측할 수 없어서, 자페아들이 사람에게는 마음을 닫지만...개와 같은 동물은 충직하고 변덕이 없어서 마음을 쉽게 연다고 합니다. 그래서 개들을 곁들인 자페아 치유 프로그램은 치유가 쉬워진다고 합니다.
동물을 대하는 사람의 마음자세가 그 사람됨의 품성이라든지 인간됨이 적나라하게 드러나는 것 같습니다.
동물과 사람은 서로 돕기 위해서 존재합니다. 그리고 동물들의 천국이 따로 있다고 합니다. 개들을 사랑안에서 키워본 사람은 알것입니다. 개들은 사람이 채워줄 수 없는 그 어떤 특별한 힘을 가지고 있으며, 사람이 감히 줄 수 없는 놀라운 위로를 주고 마음에 치유를 전달해줍니다. 저는 경우에 따라서는 어떤 개들이 천사같은 존재라고 생각합니다. 개의 모습으로 형태를 바꾸어서 나타난 천사같은 존재라고 느낍니다.
어떤 개는 사람에게서 느낄 수 없는 늠름함과 의젓함과 위용과 멋진 매력을 지니기도 하지요. 고야옹님을 한때 지켜준 그 반려견이 그랬던 것 같습니다.
님은 고양이도 키워본 듯 한데요. 고양이도 개만큼은 아니지만...감정이 풍부합니다. 뭔가를 많이 느낄줄 알고 주인의 심리를 읽습니다. 동물들에게는 의리라는 것이 있습니다. 한번 마음을 통하면 배신을 거의 않고, 충직하다는 점에서.... 개만도 못한 인간들은 개를 보고 배워야 합니다.
Uriel :
당신들의 개dog는 매우 강력한 존재이다. 신을 아는 하나One의 존재이다.
동물들은 사람들이 신을 아는 것보다 더 많이 신을 안다.
동물들은 인간과 일하는데, -- 인간이 동물을 버릴 때까지.